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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러가는하루 Aug 07. 2023

너덜너덜하던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 건

엄마, 그리고 어묵탕 한숟갈

몸과 마음이 잔뜩 너덜너덜해진 채로 퇴근하게 되는 날이 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직장에 남겨두고 온 날.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까지 드는 날. 내일은 더 잘하면 된다고 가뿐하게 넘기는 게 어려운 날.


물 먹은 솜처럼 축축하고 무거운 마음을 한가득 진 날도 어김없이 혼자 사는 6평짜리 어두운 방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서 멍하게 앉아 있다 보면 엄마에게 연락이 온다. 엄마는 하루 두 번 나에게 카톡을 한다. 잘 일어나서 출근했는지를 물어보려 오전에 한 번, 퇴근해서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려 저녁에 한 번. 아침에는 내가 10분 넘게 답장이 없으면 전화까지 한다. 서른 넘어 혼자 사는 딸이 잘 일어났는지, 잘 귀가했는지를 체크하는 게 3년째 지속되는 엄마의 루틴이다.


-딸, 잘 퇴근했나? 저녁밥은?


지긋지긋한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 날은 밥을 챙겨 먹을 기운도 없지만 엄마의 카톡은 왠지 모르게 나를 움직이게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에게는 '귀찮아서 밥 안 먹으려고' 같은 답장은 차마 보내지 못하겠다. 그래서 결국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연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어묵탕 키트.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넣고 끓인 뒤 스프와 어묵을 넣고 다시 조금만 끓이면 어묵탕이 된다. 이제 엄마에게 답장을 할 수 있다. 퇴근 잘 했고 지금 저녁 먹고 있어요.


숨을 크게 쉬고 어묵 국물을 떠먹어본다. 따뜻하고 짭짤한 맛. 이번에는 후루룩 마셔본다. 목구멍이 따땃해진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어묵탕 키트의 안내문에는 '어묵을 넣은 뒤 '살짝만' 더 끓여서 드세요'라고 되어 있지만, 나는 언제나 살짝보다 조금 더 끓인다. 충분히 끓여야 씹고 소화하기에 부담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만든 어묵탕의 어묵들은 언제나 조금 불어 있다. 탱탱하다기보다는 말랑말랑하고 흐물흐물한 어묵들. 나는 그것이 오늘 하루 나의 멘탈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꼭꼭 씹어 삼킨다. 멘탈이 무너졌을 때는 부드럽고 따뜻한 어묵탕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고 먹다 보면 어느새 또 엄마에게 카톡이 와 있다.


- 우리 딸 고마워. 혼자 잘 지내줘서.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내가 혼자서 회사를 다니고 밥도 챙겨 먹는 것이 엄마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엄마는 왜 그런 게 고마울까. 난 그냥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하는 것뿐인데. 별일 아닌 일로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단 게 감사하고, 슬프기도 하고, 든든한데 왠지 모르게 조금은 쓸쓸하다는 생각도 하면서 결국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 때문에 엄마와 따로 산 지 3년이 흘렀고 나름 독립이란 걸 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설거지만 남았다. 냄비와 수저를 싱크대에 가져가 고무장갑을 끼고 따뜻한 물을 켠다. 시원한 물줄기가 쏴아 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일단은 흘려보내자. 오늘 울적하다고 내일 출근을 건너뛸 수는 없으니까. 내일은 잘 모르겠지만, 복잡한 오늘의 마음은 오늘 다 보내버리자. 미래가 깜깜하더라도 내일도 출근은 해야 한다. 뜨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제일 깨끗한 옷을 입고 일찍 자리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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