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갓 시작했던 시절,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팀 직원들이 모두 퇴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동료들의 퇴사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나는 계속 그 팀 소속이었기에 다른 팀 직원들은 여전히 업무 관련 컨펌을 나에게 기대한단 사실이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나에게 주어지는 짐이 부담스러워 매일 밤 울었고, 직장에 가서도 몰래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황을 가만히 보면서 대비책 세우기에 게으름을 피우는 회사의 문제가 컸지만, 그때 난 내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할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 게 맞나? 괜히 잘 모르고 했다가 큰 사고 치는 거 아냐?'
'경험 많은 선배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난 아는 게 없는데 여기저기 요청이 너무 많아서 너무 힘들다.'
당시 직장에는 함께 일 얘기를 할 사람이 없었고, 나는 실무 교육 아카데미라도 가서 일에 대한 궁금증과 막막함을 해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아카데미 강사님은 온화하고 꼼꼼하셨고 끈질긴 나의 질문과 고민상담에도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직장생활이 깜깜하고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마냥 우울했던 시절, 강사님은 한줄기 빛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수업 마지막날 강사님의 말은 아직도 기억난다.
"앞으로도 궁금하거나 막막한 순간이 오면 언제든 연락해도 됩니다. 빈말 아니고 진심이니까 부담 없이 연락하세요.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선배로서 제가 이야기 들어드리고, 괜찮다면 조언도 드려볼게요."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 '도와주겠다'라는 말. 생각해보니 대학교 졸업 직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마지막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있던 날, 모든 학생을 앞에 두고 교수님은 말하셨다.
"너희들이 앞으로 졸업을 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면 정말 억울하고 속상한 일도 겪을지 모른다. 평소에는 소식 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살다가 너무 지치면 나한테 연락해라. 어느 날 갑자기 '저 00 대학교 졸업생 누군데요. 너무 힘들어서 연락했어요.' 하면 내가 무조건 너희들 편 들어주고 밥 사 줄 테니까."
교수님 말대로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조직 이슈로 비롯된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회사도 다녀봤고, 인격모독을 밥 먹듯 하는 팀장과 본인이 가이드를 잘못 줬으면서 결과물의 미흡함을 내 문제로 돌리는 상사도 만나봤다. 그렇게 삶의 어떤 막다른 골목에 몰려 내가 초라해진단 생각이 들 때면 왜인지 강사님과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막막한 순간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무조건 너희들 편인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은 있단 걸 기억하고 살아라."
그 시절 이후로 두 분과는 연락이 끊어졌다. 그럼에도 두 분의 마지막 말이 지금껏 생각나는 건, 두 분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그게 누구든 조건 없이 힘이 되어주고 나의 편이 되어주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난 두 분의 기억을 꺼내 쓴다. 상황과 사람이 원망스럽고 억울할 때뿐 아니라 직장에서 크게 실수를 해 한껏 기가 죽었을 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자기 확신이 필요할 때도 두 분을 떠올린다. 어쩌면 두 분은 오래전 자신들의 말을 기억 못 할 수도 있고 지금은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힘을 내 살게 된다.
살면서 늘 좋은 일만 겪는 건 아니지만, 돌아보면 내 삶에는 강사님이나 교수님처럼 고마운 사람들이 틈틈이 등장해 예상 못 한 에너지를 주곤 했다. 그들과 함께한 기억을 오래 되새기며 음미하고 싶다. 우연한 순간에 선물처럼 마주했던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마음, 짧은 인연이지만 그들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