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리와 세리 Mar 21. 2020

외할머니와 양파

글쓴이, 세리


 1년 6개월 동안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다시 한국으로 왔을 때, 외할머니는 익숙한 시골집이 아닌 가본 적도 없는 농촌 마을의 한 요양병원에 계셨다. 비록 매일 당뇨 약을 먹고 정기적으로 신장 투석을 받긴 했지만, 내 기억엔 여전히 시골집 안을 누비며 먹을거리를 찾고 쉴 새 없이 말을 하던 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있는 그림이 쉬이 그려지진 않았다.

 할머니는 겨울에 길에서 넘어진 것이 화근이 되어 허리와 무릎을 다쳤다고 한다. 거동이 힘들어지니 식사도 힘들고, 시골 마을이라 돌봐줄 사람을 구하기도 여의치 않았다고. 결국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요양병원에 할머니를 입원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가족들 중 아는 사람이 근무하고 있어서 믿음이 가는 곳이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할머니는 몹시도 불편해하셨다. 병원 시설이 낯설거나 사람들이 불편해서라기 보단, 자신이 이런 시설에 맡겨져야 한다는 처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 스스로 힘으로 식사도, 화장실도 갈 수 있던 사람이 이제는 타인에게 기본 욕구를 맡겨야 하다니. 결국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건 당신이 아니었을까.

 중간에 퇴원을 하기도 했었지만 한번 건강이 쇠약해진 할머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진 못했다. 병원에서 골절된 다리 회복을 위해 누워만 지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체력은 더욱 약해졌고 결국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누워 멍하니 티비만 봐야 하는 생활은 팔순 노인의 기억을 지워버릴 정도로 무섭고 단순했다. 모두가 놀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할머니의 기억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를 본 할머니는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친한 척을 하며 손녀라고 다가왔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매주 찾아가던 이모도 내 얼굴은 알아보겠냐고 거듭 물어봤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울음에 차곤 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좀 진정이 되자,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 내게 물어본 것이 있었다.


- 양파는 우쨌노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양파를 갑자기 왜 찾냐고 되 물었다. 도무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모가 말해주기를, 할머니 집 근처에 있는 양파 밭에 양파를 다 수확했냐고 묻는 것이라 했다. 그때가 초여름이었으니 시기상으로는 양파를 수확하고 밭을 정리할 시기였다. 정말 이상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의 얼굴도, 심지어 지금이 몇 월인지 몇 시 인지도 기억하기 힘들어하는 분이 양파 수확기를 기억해내다니.

 그리고 할머니가 기억한 또 다른 하나.


- OO이 밥은


 저기에 들어갈 이름은 할머니의 장남이자 나의 큰 외삼촌이다. 할머니가 입원하기 전까지 평생 함께 산 장남이, 이제 혼자 집에 남아 밥은 잘 챙겨 먹을지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치매가 와서 모든 이의 얼굴이 낯설어지는 순간에도 잊지 않는 두 가지가 양파와 아들의 식사라니. 결국 두 가지 모두 즐겁거나 행복했던 기억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제일 큰 숙제로 느껴지던 일상이라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그렇게 할머니는 종종 우리 얼굴을 기억해내고 또 잊으셨지만, 이럴 때나 저럴 때나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좋아하던 간식의 취향은 잊지 않으셨는지, 병원에 올 때마다 식구들이 사 오는 빵과 과자들을 원 없이 드셨다. 기나긴 병원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뒤에 혼자가 되셨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가벼운 옷차림이었던 것으로 보아 춥지 않은 계절이었나 보다. 오래된 기억이 이렇게나 쉽게 그려지는 이유는, 아침 일찍 엄마가 나와 동생들을 깨워 시골에 갈 채비를 했기 때문이다. 아침잠이 많아 비몽사몽 하며 채비를 하자, 엄마가 화장대 거울 앞에 나를 세워 머리를 묶어주었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본 엄마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양손을 써서 내 머리를 묶어주고 있었다. 엄마가 화가 나서 우는 모습은 많이 봤었지만, 오로지 슬픔으로 인해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그 날의 색감이 머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른 아침의 푸른빛이 돌던 안방의 모습이.


 지난주,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병원 면회가 제한되어 가족들이 한동안 방문하지 못한 시기에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셨다. 연락을 받은 가족들이 급히 한 곳으로 모여 장례를 치렀다. 해외에 있던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거리를 둬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을 부르지도 못하고 가족들만 모여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쩌면 한동안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서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은 당신의 장남 소식이 제일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곧 시작될 양파의 수확기를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 양파 농사의 근황을 물었을 땐 동네 주민들이 도와주어 다 끝냈다고 했었다. 할머니가 안도하며 더 묻지 않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이번 양파 농사도 그렇게 무사히 끝날 거라 생각하셨겠지.

 지금은 좋은 곳에 가셔서 걱정하던 장남도 만나고, 오래전 떠나신 외할아버지도 만났을지도 모른다. 부디 한평생 해온 자식 걱정, 농사 걱정들은 이곳에 두고 이제 좋은 곳에서 그간 힘들었던 얘기들 하소연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3. 장소가 주는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