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라하 서독대사관으로 뛰어든 동독 피난민들

독일 통일 이야기 (1)

by 하성식

프라하 서독대사관으로 뛰어든 동독 피난민들


1989년 9월 30일 저녁, 체코의 프라하 독일(서독)대사관.

동독-체코 국경을 넘고, 대사관 담을 넘은 동독 피난민 6,000 여명 앞에 서독의 연방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연방총리실 대표 루돌프 자이터스와 함께 나타났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오늘 여러분의 (서독으로의) 출국이 …” 그 다음 말은 6,000 여명의 함성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비좁은 대사관저 마당에서 애타게 기다려 온 바로 그 소식이었다. 피난민들 중에는 그 곳에서 이미 몇 달을 기다린 사람들도 있었고, 짧게 기다린 사람조차도 그 기간이 수 주일을 넘기고 있었다. 8월 중순부터 시작된 동독 정부와의 길고 긴 협상 끝에 마침내 피난민들에게 서독으로의 출국이 허용된 것이다.


당시 폴란드, 헝가리, 동독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인민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이러한 인민들의 경제ㆍ사회적 개혁 요구를 묵살했고, 이에 절망한 동독 인민들의 탈출 러시가 점점 큰 규모로 감행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프라하, 부다페스트 및 바르샤바 독일대사관 그리고 동베를린의 서독 상주대표부에는 점점 많은 동독 피난민들이 난입하기 시작했고, 8월 중순이 되면서 서독 정부는 이들 대사관에 대해 더 이상의 피난민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8월 말에 이르러 프라하 독일대사관에는 이미 수 천명의 피난민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차 있었다.


마침 1989년 10월 7일은 동독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일이었다. 이 날 소련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도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동독 정부로서는 프라하 독일대사관에 있는 피난민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었다.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40주년 기념일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동독 정부는 두 가지 안을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1안) 동독의 외무부 영사가 서독대사관으로 와서 동독 피난민들에게 서독으로의 출국을 허용하는 서류를 발급해 주는 안, 2안) 프라하에서 곧장 서독으로 향하는 대신, 동독의 영토를 기차로 통과해서 서독으로 이동하는 안이 그것이었다.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이 깍이지 않으면서 피난민들을 서독으로 보내기 위한 동독 정부의 최종 선택은 두번째 안이었다.


겐셔 전 외무부장관은 2009년 7월 프랑켄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10월 1일 피난민들을 위한 첫 기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동독 영토를 통과해서 서독으로 이동하게 된다는 소식에 피난민들이 술렁거렸다. 불안했던 것이다. 나는 피난민들에게, 안전하게 서독에 입국하게 될 것을 확실하게 보장한다고 큰소리쳤다. 교섭을 통해 동독 정부의 분명한 의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으로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는데, 10월 1일 첫 기차가 출발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당시의 협상은 서독의 수도 본(Bonn)에 있는 연방총리실에서 동독 상주대표부와 이루어졌다. 1974년 5월 동서독은 본과 동베를린에 각각 상주대표부를 설치했었다. 서독의 국내법상 동독의 지위는 “외국”이 아니기 때문에, 서독측 협상 담당 부처는 연방외무부가 아니라 연방총리실이었고, 협상의 대표자도 실은 연방외무부장관인 겐셔가 아니라, 연방총리실 대표인 자이터스였다. 다만, 겐셔가 당일 앞에 나서서 발표를 했고, 이 후 인터뷰에서도 마치 자신이 협상을 이끈 양 표현을 해 버렸을 뿐이다.


물론 연방외무부장관으로서의 겐셔의 역할이 이 국면에서 미미했다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유명해진 프라하 독일대사관 난간에서의 발표 며칠 전, 겐셔는 뉴욕의 유엔 총회에 참석하여 체코와 동독의 외무부장관과 이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날의 결과는 8월 중순부터 본(Bonn) 주재 동독 상주대표부와 쉼없는 협상을 벌여온 연방총리실 대표인 자이터스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날의 주역으로서 겐셔만이 각광받는 것은, 대사관 난간에서 발표하던 겐셔의 모습이 담긴 TV 장면들 때문이었다. 미디어의 힘은 그렇게 막강한 것이다.


올해 독일 정부는 프라하 독일대사관 건물을 매입하고자 체코 정부와 교섭 중인데, 이 건물의 난간 이름은 이미 “겐셔의 난간(Genschers Balkon)”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또한 프라하 독일대사관이 주최한 이 날의 20주년 기념식에 결국에는 겐셔와 자이터스 두 사람 모두 초대를 받게 되었지만, 애초에는 자이터스의 이름이 초대장 명단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의 주역이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버린 것이다.


프라하의 독일대사관에 뛰어든 동독 피난민들이, 동서독 정부간 교섭을 통해 서독으로 입국하는 이 사건은, 독일 통일로 가는 초입에서 일어난 무척 극적인 사건이었다(그로부터 40일 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환희에 찬 6,000 여명의 동독 피난민들을 태운 이 열차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쳐, 통일 독일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예측할 수 없는 길을 마구 내닫기 시작한다.


통일로의 문이 살짝 틈을 보였고, 우리는 그 문을 냉큼 들어섰으며, 곧 바로 그 문은 닫혀 버렸다. 헬무트 콜 총리가 통일 후 한 말이었다. 그 때가 아니었다면, 결코 통일의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 쥐었다는 자화자찬이었다. 그 발언에 반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노회한 정치가의 뛰어난 레토릭이었다. 어쨋든 통일은 이루어졌고, 이후 동서독간 경제적ㆍ사회적 통합이라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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