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라이프찌히의 월요시위

독일 통일 이야기 (2)

by 하성식

라이프찌히의 월요시위 (1989년 10월 9일)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독일 통일을 언급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독일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인이다. 1989년 가을, 동독 라이프찌히. 그 격변기의 현장에서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제공한 정치외교적 배경을 무대로 하여, 라이프찌히 니콜라이 교회의 크리스티앙 퓌러 목사는 라이프찌히 시민들과 함께 동독정권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촉발시키게 되는 하나의 사건을 연출하게 된다. 바로 1989년 10월 9일에 벌어진 라이프찌히 월요시위다.


고르바초프와 호네커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고르바초프. 그가 서기장으로 선출된 시기의 소련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직전이었다. 고르바초프와 그의 주위에 포진한 개혁 성향의 참모들은 1986년 마침내 페레스트로이카(개편, 변화)와 글라스노스트(표현과 정보의 개방 또는 자유)라는 구호 아래 소련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이러한 소련의 변화는 즉시 동구권의 다른 사회주의 국가로 전파되었고, 이 후 전개되는 동구권 인민들의 드높아진 개혁 요구의 불씨가 된다.


다시 1989년 가을, 이미 인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있던, 다른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동독 정권은 인민들의 개혁 요구를 여전히 묵살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마르크스주의 본가의 진정한 대변자(Ein wahrer Vertreter der Heimat des Marxismus)임을 자처하고 있던 독일통합사회당(SED)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자,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가 있었다. 그는 당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고르바초프는 독일통일에 대한 회고를 담은 책에서, “지금 변화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이라고 주위를 설득했으나, 유일하게 호네커만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미 1989년 5월 2일, 약 600 여명의 동독인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9월 10일에도 국경 근방에서 텐트 생활 중이던 약 30,000 여명의 동독 피난민들에게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이 개방된다. 체코 프라하 서독대사관에 난입해 있던 6,000 여명의 동독인들에게도 9월 30일 서독으로의 출국이 허용된다. 이들 피난민들을 태운 열차가 통과하던 동독의 드레스덴 중앙역에서는, 모여든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일부 시위대는 무리하게 열차에 올라 타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서방으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라는 인민들의 요구는 점점 더 높아져 가고만 있었다. 한번 분출되기 시작한 인민들의 요구(여행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는 걷잡을 수 없었고, 체코와 헝가리를 경유한 서방(서독과 오스트리아)으로의 탈출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크리스티앙 퓌러 목사


1982년 이래로 동독 라이프찌히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매주 월요일 동서 진영간 군비경쟁에 반대하는 평화기원 기도회가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이를 조직하고 이끈 사람이 당시 목사였던 크리스티앙 퓌러였다. 사람들은 그를 베를린장벽 붕괴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9년 9월 4일, 월요일 라이프찌히 시내. 니콜라이 교회에서 월요일 오후 5시에 정례적으로 열리는 평화기원 기도회를 마친 후,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유와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된다. ‘월요시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동독의 다른 주요 도시들(드레스덴, 할레, 슈베린, 칼-막스 슈타트, 막데부르크, 플라우엔, 로슈톡)에서도 월요시위가 퍼져 나가고 있는 가운데, 라이프찌히에서 10월 9일 니콜라이 교회와 또 다른 세 곳의 교회에서 평화기원 기도회가 끝난 후 무려 70,000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내 중심가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라는 단어가 독일 통일의 역사에 뚜렷하게 기록되는 계기가 된 1989년 10월 9일의 라이프찌히 월요시위였다.


이 날 처음으로 등장한 구호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였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일당 독재를 하던 독일통합사회당(SED)도, 정부도 아니고, 이제는 인민(국민)인 바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며,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한 것이다. 동독 정권의 붕괴를 예언하는 듯한 이 날의 구호와 함께 민주화를 향한 동독인들의 평화적인 혁명(독일에서는 프랑스혁명에 기대어 이를 독일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은 무서운 기세로 불붙게 되고, 드디어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 8,000 명의 경찰과 군인이 무장한 상태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시위대는 “우리가 인민이다”, “비폭력(Keine Gewalt !)”을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으나, 만약 무력으로 진압이 시작된다면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경찰과 군인은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고 철수해 버리고, 이 날의 시위는 끝까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11월 9일, 독일 분단의 상징이자,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철의 장막이 벗겨진 것이다.


후기: 2009년 10월 9일 열린 라이프찌히 월요시위의 20주년 기념식에서 독일연방대통령 호르스트 쾰러는 당시 시위의 상황에 대해 연설하면서 부정확한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빈축을 사고 있다고, 다음 날 뉴스가 전하고 있다. 문제가 된 내용은, 그 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가 시 외곽에 포진하고 있었고, 시청에는 총상에 대비한 수혈용 혈액과 시신을 담기 위한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민들이 시내로 집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독정권이 퍼트린 소문이었을 뿐인데,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한 내용을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역사적 사실로 왜곡시킨 중대한 실수였다는 비난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 프라하 서독대사관으로 뛰어든 동독 피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