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지금까지 그 코너는 늘 막다른 길이었다. 좋아질 것 없는 현실과 반복되는 실패가 만든 불편한 장소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코너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질 것 없는 현실과 패배감만 이겨내면, 그 너머로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아주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뜻밖에도 가까운 곳에서 찾아왔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만해 형에게서 식당 사장님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당분간 운영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형의 말을 듣자마자 물었다.
“그럼 식당은 누가 운영해?”
“아마 문 닫지 않을까. 그건 안 물어봤네.”
“형, 내가 그 식당 운영해본다고 하면 거절당하려나?”
나는 진지하게 그 식당을 내가 맡아보고 싶었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없으니 다른 데 취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도서관을 다니며 본 이 지역 국회의원 후보들이 사법고시 폐지로 고시 부활이나 혹은 장수생들에게 창업교육이나 자금 등을 지원하는 공약을 내걸고 있음을 확인했기에 정책적으로도 뭔가 될 수도 있어보였다. 형은 사장님께 직접 연락해볼 것을 권했다. 나는 곧바로 사장님께 안부도 전할 겸 연락을 취했다.
평소와 달리 열정적으로 가게를 운영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자 사장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돈은 있어요?”
당연히 생활비도 빠듯했기에 돈은 없다고 했다. 대신 매월 일정 금액을 사장님께 드리는 조건으로 운영해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책에서 본 방법으로, 기간을 정해 가게의 보증금과 권리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분할로 사장님께 지급하는 구조였다. 적극적으로 방법을 설명하는 내게 사장님은 제안은 좋지만, 만약 장사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지급할 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사장님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가게를 인수할 사람을 찾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사장님의 뒤이은 한 마디는 잠시 타올랐던 여린 열정을 꺾기 충분했다.
“내가 장해 씨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식당은 아무나 운영하는 줄 알아요? 열심히 준비해도 망하는 게 식당이에요.”
난 사장님의 말에 재차 식당 운영의 의사를 내비칠 수 없었다. 분명히 내 인생이 변할 것만 같았는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고 그에 비해 나의 의지는 나약했다.
‘책 좀 읽었다고 인생이 바뀔 것 같으면 누가 못하겠어.’
헛된 생각을 했던 스스로가 한심해 공원 벤치에 앉아 수민동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시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뭔가가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늘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시작조차 하지 못했으니 다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르바이트부터 빨리 구해야 했다. 식당 운영이 아니라 당장 고시원 비용도 마련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맞지도 않았고 자신이 그리 성실한 인간도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식당이 문을 닫게 된 후 만해 형과 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형은 요즘 많이 하는 물류센터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묶여 있는 식당 일보다는 원하는 날만 일할 수 있고 급여도 높은 이 일이 더 낫다고 말했다. 선택지가 많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형 말대로 물류센터는 쉬운 대안이었다. 하지만 난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많이 내려온 인생이지만 더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형, 지금 내 처지에서 뭔가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 거 정신 나간 소린가?”
“왜, 회사라도 차리게?”
형은 크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사장님께 이야기는 해봤어?”
형에게 사장님과의 했던 대화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장님 말이 틀린 것 없고, 나는 그저 막연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겨서 그랬다고 덧붙였다. 가볍게 이야기했는데 형은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말에 안 한다고 했어?”
“틀린 말 아니잖아? 그래서 알겠다고 했지. 사장님 말대로, 열심히 준비해도 안 되는 게 장사고...”
“야, 지금까지 내가 왜 이 모양인지 알아? 쉬운 선택만 해서 그래. 할 수 있는 게.”
평소 감정 동요가 거의 없는 만해 형의 말에 나는 순간 눈이 번뜩였다.
“형, 그 어려운 선택 지금하자.”
우리는 식당을 하기로 했다. 혼자서는 사장님이 말한 장사가 안 될 때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없었지만, 함께 분담하며 답을 찾았다. 형은 처음엔 정신 나간 소리라고 했지만, 이미 난 형의 마음을 읽었다. 분명히 형도 자신을 가두고 있는 고시원이라는 곳의 경계를 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려운 선택’을 한 셈이었다. 어쩌면 우리처럼 인생에서 너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일을 일단 벌이는 것도 자체가 좋은 선택일 수 있었다.
사장님께서도 많이 배려해주셨다. 장사가 잘 되지 않을 경우 형과 함께 비용을 마련해서 어떻게든 갚겠다고 하자, 괜히 나이 많은 장수생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며 몇 개월 동안은 돈을 유예해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대신 잘 해서 이자까지 챙겨주면 좋겠다는 말을 웃으며 덧붙였다.
내 인생은 코너로 몰려 더 이상 밖으로 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수민동 고시촌에서도 더 이상 갈 곳 없는 꼭대기까지 몰렸기에 그 고통은 더 컸다. 하지만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생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늘도 형과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더 좋은 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구하기 위해 인근 시장을 돌았다. 내부 청소도 빠짐없이 하고, 온라인 카페에 홍보하는 것도 당연했다. 내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우리가 2막을 시작하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땀 흘리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보며 또 한 번 깨달았다. 우리는 삶을 포기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버텨낸 덕분에 비록 늦었지만 다시 꽃을 피울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단편소설] 장하다, 장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