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se Nov 12. 2019

뱃살입니다만, 문제 있으신지?

직장 상사의 아무 말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토해 내듯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 중의 한 명인 채로,

지하철 게이트에 교통카드를 찍고 나서자마자 지도 앱을 켠다.


회사 근처까지 바로 가는 한 대 밖에 없는 버스가 지나간 직후.

내 운은 어디에 다 써버린 걸까.


“걷는 게 빠르겠다”

5분만 더 침대에서 뒹굴거린 아침의 나에게 험한 말을 하며

빠르게 출구로 걸어 올라간다.

어차피 똑같이 피곤한 거 그냥 일찍 일어날걸 하는 후회는

왜 아침마다 하고 있는지.


뛰는 듯 걷는 듯 걸음을 재촉해 출근 시간을 지나지 않고 지문을 찍었다.

가벼운 사회생활 미소를 장착하고 여기저기 눈인사를 흘리면서 익숙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컴퓨터의 팬 소리.

멍하니 검은 윈도 부팅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스윽- 스윽- 뒤꿈치를 끄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온다.

오늘은 내가 타깃인가.

옆까지 가까워오는 걸 겨우 무시하고 있었는데

한껏 인기척을 내며 바로 옆에 멈춰 선다.

어김없이 반듯하게 다림질된 옷깃에 겹쳐 입은 니트 조끼.

분명 저 조끼는 성난 단추들을 가리기 위한 것이리라.


“A씨, 좋은 아침”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저리 들뜨셨을까 싶은데, 빠른 대꾸를 재촉하는 표정이다.


“아 네,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아침에 A를 보면 항상 기분이 좋지”


세상 사람 좋은 척하는 얼굴에,

하하하 하며 웃어 보였지만,

인터넷 짤의 대사들이 목 끝까지 치솟는다.

언젠가 나도 찰지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으려나.


“근데, A씨”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낸다.


“살이 쪘나 봐? 전혀 몰랐는데, 보니까 쪘네 쪘어. 혹시 임신이야?”

얼굴 근육을 한껏 삐죽거리며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자기 배를 둥그렇게 쓰다듬는다.


머리가 멍해진다.

이럴 때 해야 할 말이 오조오억개쯤은 있을 텐데,

왜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걸까.


“다이어트 열심히 해야겠네요”

아쉬운 듯 웃어 보이니, 이제야 만족한 듯 자리를 뜬다.

“임신한 건데 살찐 거라고 실수할까 봐 그렇지 뭐”

힘내라는 듯 앙다문 표정을 보니 기가 찬다.


멀어지는 슬리퍼 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배에서부터 깊은 탄식이 올라온다.


컴퓨터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데,

“임신이야?”하며 둥그렇게 배를 쓰다듬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잘근잘근 씹힌다.


아, 기분 나쁜 티라도 냈어야 하는데.

아무 말 못 한 나 자신이 더 싫어져서, 생각할수록 치밀어 오른다.


아니, 잘못한 건 저 사람인데, 왜 내 기분만 나쁜 걸까.

아니, 도대체 저런 말을 왜 하는 거지.

아니, 이런 상황에선 뭐라고 대꾸해야 하는 건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짜증을 삭이며,

저 사람의 퇴직일이 언제인지 떠올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