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생각
"이거 누가 글 올린걸까?"
"우리도 등 떠밀려서 억지로 기획한 행사인데"
"세상에..남의 일 대신 해준건데 욕은 우리가 다 먹네"
사무실에 출근하니 팀 동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대화하고 있다. 내용을 들어보니 어젯밤에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우리 팀 관련 비난글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최근 보안 이슈가 많기에 보안팀에서 우리 팀에 보안교육을 해주면 안되겠냐고 요청이 들어왔다. 거절할 수가 없어서 들어줬는데 바쁜 사람 불러서 반나절이나 교육을 한다고 직원들이 불만을 가진 것이다.
"이상한 외부강사 데려와서 쓸데없는 소리만 한다"
"바빠서 못 간다고 하니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협박한다"
"너네가 일을 그 따위로 하니까 인사팀을 다들 싫어하는거야"
비난하는 댓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올라왔다. 이 현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십여년 전부터 직장인들에게 핫한 앱이 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블라인드 앱이다.
블라인드는 각 회사 별 방이 있다. 회사 이메일 인증을 거치기 때문에 외부인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 블라인드의 최대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익명성'이다. 서버가 미국에 있기에 서버 수사가 불가능하다.
명예훼손으로 누가 경찰에 고발하더라도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몇 년 전 LH에서 회사 임직원들이 내부 정보로 개발 예정인 땅을 지인 명의로 대거 사들여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때 LH 한 직원이 블라인드에 글을 올렸다.
"꼬우면 너네도 공부 열심히 해서 LH 들어오시던가.
괜히 배 아프니까 깎아내리기 바쁘지"
이 글이 밖으로 유출되었고 기사화되었다. 당연히 벌집을 쑤신 듯이 여론이 악화되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끝내 서버를 수색할 수 없었다. 미국의 협조가 필수인데 테러, 인신매매, 마약 등 중대 범죄가 아닌 이상 미국에서는 쉽게 수색영장을 발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블라인드 앱은 신뢰도가 상승했다. 경찰이라는 창도 뚫지 못하는 천하무적의 방패가 된 것이다.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 유튜브를 다 하는, 꽤 알려진 분이 계신다. 세 곳을 둘러보다가 신기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 분의 블로그나 브런치스토리에는 악플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칭찬에 덕담에 훈훈한 댓글만이 가득했다. 마음이 정화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유튜브는 사뭇 반응이 달랐다. 지지하고 응원하는 댓글이 대다수였지만, 종종 다른 생각을 밝히거나 비꼬는 댓글도 있었다. 한 얘기 계속 재탕한다는 반응도 있고, 비현실적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왜 블로그, 브런치스토리와 유튜브 댓글은 반응이 사뭇 달랐던 것일까? 그건 바로 익명성의 여부이다.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야 글을 쓸 수 있는 블로그, 브런치스토리와 댓글만 띡 쓰면 그만인 유튜브는 다르다. 남의 블로그, 브런치스토리에 함부로 나쁜 댓글을 달면 보복 공격을 당하기 딱 좋다. 내 집과 같은 내 블로그에 스커드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유튜브는 그렇지 않다. 유튜브를 개설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내 공간이 없다. 내 정체성을 익명성에 가릴 수 있기에 나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진흙탕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이런 난장판이 없다. 그래도 내가 누군지 모르니, 내 집이 더렵혀지지 않으니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익명성은 이런 가면을 제공한다. 예전 송강호가 주연했던 영화 '반칙왕'에서 매일 회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구박만 받는 송강호는 타이거 마스크 가면만 쓰면 용기가 솓아난다. 좋아하는 회사 여직원에게 말도 못 걸지만, 타이거 마스크를 쓰자 기꺼이 꽃을 들고 그 여직원 집까지 찾아가는 용기를 보여준다.
익명성은 나의 다른 인격인 페르소나를 제공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익명성이라는 가면만 쓰면 다 할 수 있게 된다.
익명성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돈도 그 자체로는 종이 쪼가리지만, 사람을 홀리듯이 익명성도 그런 존재이다. 익명성은 필요하다. 블라인드가 활성화되면서 확실히 팀장 이상 관리자들이 조심하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까불다가는 골로 간다는걸 잘 알기에 팀원들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 개인의 사생활 들추기 등 부작용도 큰 것이 사실이다. 그냥 친한 남녀 직원인데 블라인드에서 불륜설을 떠트려서 큰 곤혹을 치른 사람들도 있다. 회삿돈을 횡령하고 문제가 되자 오히려 팀장을 블라인드에서 무고한 경우도 있다.
블라인드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 전에 이것만 말하고 싶다. 사실 나는 블라인드에서 나를 지목하는 글이 올라오는 바람에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회사 비용처리 규정이 개정되면서 처리가 늦어졌는데 일 제대로 안하고 돈도 제 때 안 준다고 내 실명이 올라온 것이다. 그랬더니 여기에 동조하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렸다.
내가 직접 블라인드에 실명 까고 해명글 쓰기도 어렵고, 경찰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봐야 수사도 진행 안된다. 그 때 너무 속상해서 몇 일을 잠도 못 자고 가슴 앓이했던 기억이 난다. 왜 악플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이 자살을 시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블라인드에 비판할 건 비판하고 욕할건 욕하자. 그러나 선은 지키자. 언제든 나도 블라인드에서 지목 당할 수가 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확인되지 않는 것들, 잘 알아보지 않고 홧김에 올리는 글을 누군가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일이다.
비판을 할 수 있지만 그게 도를 넘어서 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면 안된다. 그 순간 그건 인신공격이 된다. 익명성이 부디 건전한 소통을 위한 도구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