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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물어보시나요?

일못러에서 벗어나기

by 보이저

항상 월말이 되면 법인카드 사용 건들을 전표로 작성하느라 분주해진다. 원하는 대로 척척 전표를 작성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예산이다. 전표 하나 작성하려고 하면 부서 예산이 똑 떨어져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은 예산 주관 부서에 손을 벌려야만 한다.


이번에도 딱 그런 경우였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전표 입력 안 하면 한 달 더 기다려야 입금된다고 회계팀에서는 험표를 놓는다. 근데 벌써 수요일이다. 딱 이틀 남았다. 일단 기획팀에 예산 증액 신청을 한다. 그러나 결재가 다 끝났는데도 예산을 주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기획팀 담당자에게 전화를 한다.


"예산 증액 신청 했는데, 왜 예산을 안 주시나요"

"예산드렸는데요"

"안 주셨어요. 전표 작성하려고 하는데 예산이 부족하다고 나와요"

"분명히 드렸어요. 다시 확인해 보세요"

"안 주셨다니까요?"



조금 뒤 일이 터졌다. 그 기획팀 담당자는 시스템 화면을 캡처한 것을 이메일로 보냈다. 거기에는 예산이 부여되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문제는 참조에 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팀장은 나를 부른다.


"왜 자꾸 기획팀에 재촉해서 일을 키워? 담당자가 엄청 화냈다는데?"

"예산이 안 들어와서 독촉한 겁니다"

"8월 달 예산으로 신청했잖아. 지금 7월이니 당연히 전표 작성 안되지. 네가 잘못 신청해 놓고 기획팀 담당자에게 자꾸 따지면 어떡해"



응? 8월로 신청했다고? 다시 확인해 보니 시스템을 캡처한 화면에는 떡하니 '8월'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잘못 신청해 놓고 다짜고짜 기획팀 담당자에게 짜증을 냈던 것이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화내는 사례들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 그러고도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따졌으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그랬던 케이스였다. 사실 무식하면 용감한 일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벌어진다.


- 법 규정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관공서로 쫓아가서 허가 안 내준다고 삿대질하는 사람

- 오프사이드가 명백한데도 골 인정 안 해준다고 심판에게 욕하는 축구팀 감독

- 전자제품 코드를 안 꽂았으면서 제품에 문제가 있다고 고쳐달라고 항의하는 소비자



조금만 더 확인하면 되는데, 그럴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빨리 해결되었으면 하는 조급만 마음이 겹치니 상대방을 닦달하게 된다. '문제의 원인은 나도 모르겠고, 일단 해결이나 해줘!' 이런 마인드로 징징대는 것이다.


예전에 회계팀에서 일할 때 이런 사람들이 참 많았다. 전체 부서에서 돈 관련 궁금한 점이 있으면 죄다 회계팀으로 전화를 한다. 이런 전화는 대개 만만한 사 원급들에게 걸려온다. 회사 사이트에서 조직도를 검색한 뒤에 사원급 명단을 찾아 전화를 하는 것이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데 하루 수십 통씩 문의 전화를 받게 되면 짜증이 밀려온다. 여기가 무슨 콜센터도 아니고...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사람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치고받고 싸우고 싶지만 사원급 직원이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런 고충을 아는 내가 정작 일이 안 풀리니 다른 부서 담당자에게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짜증부터 낸 것이다. 피해자가 시간이 지나자 가해자가 된 전형적인 내로남불 케이스가 나였던 것이다.




상대 부서와 관계가 악화될 때 문제점


대부분 업무 프로세스를 잘 모를 때 이런 일이 생긴다. 내가 원하는 결과만 생각하고, 그 그림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남 탓부터 하는 것이다.


아까 소개했던 전표 작성 사례에서, 전표 작성을 위해서는 내가 속한 팀에 그 예산이 있어야 한다. 그 예산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확보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되지 않다면 소속 리더 결재를 거쳐 기획팀 승인을 받은 뒤 예산을 받아야 한다. 예산은 월 단위로 관리되기에 시기에 맞게 신청해야 한다.


이런 프로세스를 모르면, 전표가 작성되지 않는다고 화부터 내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짜증이 난다. 가뜩이나 바쁜데 억지 부리는 사람이 좋게 보일 수 없다. 사실 기획팀 같은 부서는 계속 접촉해야 하는 부서다. 내가 필요할 때 손을 벌려야 하는 곳인데, 관계가 나빠지면 일하기 참 힘들어진다.




바람직한 대처 방법


급할수록 돌아가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아래 순서에 맞춰 확인하고 물어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1. 물어보기 전에 먼저 확인하자


업무 프로세스를 이해하자. 이걸 모르면 질문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잘 모르는지 알아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고, 상대방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다.


"업체에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거래처 리스트에 그 업체가 안 떠요"

"그러면 거래처 등록이 안 된 거예요. 먼저 거래처 등록부터 하셔야 합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회계정보 사이트 상단 우측에 거래처 등록 메뉴가 있어요. 거기에서 등록하시면 됩니다. 계좌 사본, 사업자등록증, 인감증명서 원본 첨부해주셔야 해요"

"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당장 내일 돈 받아야 하는데 대신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저희 보고 해 달라고요? 매뉴얼도 있으니까 그거 보면서 하시면 안 어려워요"



일단 방법만 잘 알고 있으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한 번만 더 확인하자. 컴퓨터의 경우도 모든 문제의 1/3은 전원만 껐다가 다시 켜도 저절로 해결된다고 한다. 한 번만 살펴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2. 질문사항을 미리 정리한 뒤에 물어보자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어보면 꼭 물어봐야 할 것을 빠뜨리거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물어보는 등 뒤죽박죽이 된다. 질문할 내용은 미리 정리해서 물어봐야 나도 꼭 필요한 내용을 질문할 수 있게 되고, 상대방도 이해가 쉬워 정확하게 답변해 줄 수 있다.


- 거래 업체에 대금을 지급하고 싶은데, 거래처 등록은 어떻게 하는지

- 등록에 필요한 서류는 무엇이 있는지

- 서류를 받을 때 주의 사항이 별도로 있는지

- 결재 시 결재라인은 어떻게 되는지

- 거래처 등록 후 예산 확보, 전표 처리 이런 순서로 진행하면 되는지

- 이 과정이 쉽게 정리되어 있는 매뉴얼은 없는지



이렇게 정리해서 물어보면 체계적으로 내가 필요한 것을 질문할 수 있고,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3. 기록으로 남기자


전화통화나 직접 만나서 해결하려고 하면 기록에 한계가 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게 된다. 그 자리에서는 다 이해한 것 같지만 막상 직접 해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 투성이일 것이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을 해야 그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하려고 할 때 기억이 안 나면 그 기록에 의존해서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 거래처 신규 등록하려면 회계 ERP 시스템에 접속해서 '상단 위쪽'의 거래처 신규 등록 버튼 클릭할 것

- 신규 등록하는 업체의 계좌번호, 거래 은행, 가상 계좌 여부, 법인인지 개인사업자 표시할 것

- 인감증명서는 원본으로 하여 최근 3개월 이내 발급받은 자료로 첨부할 것

- 결재는 팀장 전결로 할 것

- 거래처 등록 결재가 완료되면, 예산을 확보한 후 전표를 작성할 것

- 문제가 생겼을 때 문의는 회계팀 정 OO 대리에게 문의할 것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으면 이 자체가 매뉴얼이 된다. 잘 모르면 찾아보면 되고, 추가 궁금증이 생길 때는 이 자료에 덧붙이면 된다. 나중에 업무 인수인계를 할 때 이 자료를 넘기면 된다.




4. 독촉하지 말자


급한 마음에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자꾸 독촉하고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면 상대방도 슬슬 짜증이 나게 된다. 물론 그 직원이 잊어버려서 일이 늦어지는 경우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본인도 사정이 있는데 상대방이 독촉을 하게 되면 반발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한참 내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빨리 해달라고 독촉하면 나도 화가 날 것이다. 자꾸 독촉하면 해주려다가도 하기 싫어진다. 숙제하려고 마음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부모님이 빨리 숙제하라고 다그치면 하기 싫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일단 여유 있게 상대방에게 시간을 주고 그 시간 동안은 독촉하지 말고 기다리자.




마무리하며


일을 하다 보면 내 뜻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이 때는 남 탓부터 하기 쉽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일이 안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시스템이 이상해서, 담당자가 일을 처리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사실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서 일이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급할수록 돌아가자. 그리고 한 번만 더 확인해 보자. 그래도 잘 안된다면 내가 잘 모르는 것을 정리해서 물어보자. 그래야 나도 이해하기 쉽고 상대방도 내 질문을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답변해 줄 수 있다.


내 입장만 생각하고 질문하고 독촉하게 되면 상대방과의 관계는 틀어지게 된다. 한두 번 만날 사이도 아닌데 관계가 틀어져 버리면 앞으로 일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최대한 정중하게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해서 시간을 두고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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