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앞서게 되면 곤란합니다 (갑신정변 실패1)

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by 보이저

람에게는 누구나 원대한 계획이 있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 1년에 순수익으로 최소 2억은 보장될 테고, 그러면 초기 투자비는 2년 만에 회수 가능하다. 7년 안에 10억을 벌 수 있다. 사업을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는 행복 회로가 벌써부터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순수익 2억을 기대했건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다지이다. 게다가 주변에는 경쟁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다급한 마음에 거액의 대출을 받아 리모델링도 진행하고 공격적인 마케팅도 시행했다. 어떻게든 궤도 위에만 올려놓으면 돼! 그러나 좀처럼 궤도에 오른 기미는 보이지 않고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빨리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싶은 욕심에 팀원들을 쥐어짜며 온갖 일을 벌이다가 팀원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벌여놓은 일은 수습도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우리 역사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나라를 확 바꿔보겠다는 의욕이 넘치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처럼 우리도 부강한 나라가 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이들은 거사를 준비했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그 사건은 바로 '갑신정변'이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라 문을 여는 조선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은 이미 나라의 국운이 다해가고 있었다.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했고, 중앙 정부는 몇몇 세도 가문들에 장악당했다. 나라 밖에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며 하나둘씩 자기 세력 하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끝끝내 나라 문을 걸어 잠 갔던 조선은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문을 열게 된다.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강국들과 차례로 조약을 맺고 나라 문을 열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라 밖 소식을 전혀 모르고 살던 조선에 있어 부강한 서구 열강들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아직도 가마를 타고 다니고 길의 폭은 채 2미터도 되지 않던 조선에 있어 증기 기관차가 다니고 전등이 켜지고 전신으로 소식을 바로바로 주고받는 모습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고종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1883년, 한 무리의 관료들을 미국과 영국, 프랑스로 보내었다. 이들은 증기 기관차의 엄청난 속도를 보고는 바람도 따라가지 못할 속도라고 칭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서는 하늘로 날아간다고 바닥에 넙죽 엎드리기도 했다. 편지를 쓰면 며칠 안에 배달되는 것을 보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조선은 조금씩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개화파,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은 서구 문물에 우호적인 개화파와 기존 성리학 가치를 지키려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개화파 역시도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김옥균을 필두로 당장 모든 것을 다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급진파와 민영익 중심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강조하는 무리로 나뉜 것이다.


김옥균은 불과 22세에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한 천재였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출세가 보장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무너져가는 조선을 구하고 싶었다. 프랑스가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것, 미국은 왕이 아닌 대통령이 국민의 투표로 4년마다 선출된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왕정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런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사촌지간이었던 권세가 민영익은 서서히 나라를 개혁하고 싶어 했다. 민 씨 권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나라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 둘 간에는 갈등이 점점 심해졌다. 김옥균과 뜻을 같이하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등이었다.


서재필은 불과 18세에 과거 대과시험에 최연소 합격한 천재였다. 박영효는 직전 왕이었던 철종의 사위로서 왕실의 일원이었다. 홍영식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홍순목의 아들이었다. 모두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에 권세가 자제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기득권은 기꺼이 내려놓을 각오가 된 사람들이었다.

개화파


서구 문물을 접하는 개화파


그들 중 홍영식과 서광범은 1883년,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 각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들이 소개하는 서양 문물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긋기만 하면 불이 붙는 성냥부터 시작해서 10층에 이르는 고층건물들, 기차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무엇보다 그들은 세계지도를 처음 접하고는 놀라게 되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이렇게 생겼던 것이었다.


옆나라 일본이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발전한 것은 큰 자극이 되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던 일본이 (사실 비슷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개화 이후 서구 문물을 수용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것이다. 우리도 일본처럼 국가를 개혁하고 서구 문물을 도입하면 나라가 확 바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갑신정변을 기획하다


그러나 조선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500년 가까이 공자왈 맹자왈 성리학만 외치던 사회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뀔 리 없었다. 일반 백성들은 개화 이런 게 뭔지도 몰랐고, 고종이나 일반 고위관료들은 서양문물에 호기심은 있었지만, 자기 권위에 조금이라도 스크래치가 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나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명성황후 세력들은 개화에 부정적이었다.


개화파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라면 백 년이 지나도 개화는 요원할 것만 같았다. 그 보수적인 청나라 조차도 지금 양무운동을 내세워서 나라를 뜯어고치고 있는데 조선만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들은 거사를 일으키기로 조용히 뜻을 모았다.


그들은 살생부에 사람들을 하나씩 올렸다. 가장 앞장서서 개화를 반대하던 민 씨 일족들이 가장 먼저 이름이 올라갔다. 그중에는 민영익도 있었다. 불과 1년 전에 홍영식과 민영익은 보빙사 일행으로 전 세계를 돌며 개화의 필요성에 같이 공감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개혁의 속도를 두고 둘은 갈라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칼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고 만 것이다.


우정국 개최 행사일을 이들은 거사일로 정했다. 우정국은 우체국의 전신으로 미국에서 우편 시스템을 감명 깊게 본 홍영식의 제안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때 미국, 영국, 일본, 청나라 외교관들이 초청될 예정이었다. 대내외에 조선의 개화를 널리 알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마침 베트남 영유권을 놓고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있던 청나라 병력 4,000명 중 2,000명이 베트남으로 떠난 상태였다. 청나라는 쉽게 분쟁에 개입하지 못하리라고 이들은 확신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거사에는 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무기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는 그들이 무슨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당시 일본 공사는 다케조에 신이치로라는 사람이었는데 일본 대사관을 지키던 일본군 150명의 지원을 받기로 약속하였다. 그 외 자객들을 포섭하여 우정국 행사장을 급습하기로 하였다.




개화파, 국가를 장악하다


우정국 행사가 열리던 날, 행사장은 고종과 고위 대신들, 각 국 외교관들이 모여 흥겨운 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인근 초가집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불이야"

여기저기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것이 개화파들의 신호탄이었다. 당초 개화파들이 포섭한 자객들이 이때 연회장에 뛰어들어 살생부에 포함된 대신들을 한 번에 제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침 민영익은 이때 밖에 있었다. 자객 중 하나는 민영익을 알아보고 밖에서 칼로 그를 내리쳤다.


"사람 살려!"


그는 비명을 지르며 피투성이가 된 채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하객들은 소리치며 도망가기 바빴다.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수라장 속에서 자객들은 도대체 누구를 죽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갑신정변


그들은 급하게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 150명을 데려와서 궁궐을 장악하게 했다. 그리고 고종에게는 친 청나라 세력들이 청나라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허위 보고한다. 개화파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운궁이라는 조그만 궁궐로 피신하게 한 뒤 미리 준비했던 개혁안을 발표한다.


- 문벌을 폐지하고 신분제를 개혁한다.

-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 관청을 통폐합하고 정리한다.


이렇게 하나씩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기치를 올렸다.




삼일천하로 끝난 정변


그러나 청나라는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 공사는 위안스카이(원세개)였다. 청나라를 멸망시킨 주역이었던 위안스카이가 당시에는 26살의 젊은 나이에 청나라 공사로 조선에 있었다. 그는 고종에게 "너 같은 것도 임금이냐?" 이런 소리를 대놓고 하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청나라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직접 궁궐로 쳐들어갔다. 개화파가 의지했던 일본군은 전투 의지가 전혀 없었다.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인천 제물포항으로 곧바로 철수해 버렸다.


다급하진 개화파는 고종을 인질 삼아 대치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자초지종을 파악한 고종이 다 망한 개화파 편을 들어줄 리 없었다. 고종은 관우를 모신 사당인 북묘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고종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청나라 군이 장악한 곳이었다.


개화파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그대로 다 죽을 판이었다. 이들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따라 그대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개화파 중 홍영식은 아버지가 조선의 이인자인 영의정이니 설마 나를 죽이지는 못하겠지 이 생각을 하며 조선에 남았지만, 반역자로 낙인찍힌 그에게 이인자의 아들 이딴 자비란 없었다. 홍영식은 칼로 무참하게 찔려 죽고 말았다.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등은 그렇게 일본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반란은 가족까지도 처형한다는 조선의 법에 따라 그들의 가족들은 모두 죽을을 면치 못했다. 이들의 세상은 딱 삼일 만에 끝났다.




갑신정변의 후유증


이 사건 이후로 사람들은 개화의 '개'자 이야기도 꺼내기 힘들어졌다. 사회 분위기가 개화에 극도로 적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개화파 이야기만 나오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개화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제일 신이 난 것은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였다. 청나라에서는 그의 공을 치하하면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렇게 위안스카이는 출세의 길이 펼쳐지게 되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감시와 탄압 속에 신음하게 되었다.




도피 후 개화파들의 미래


고종은 암살단을 보내 김옥균을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다. 김옥균은 10년 간 도피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의 총에 맞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심지어 그의 시체는 능지처참되어 도성 밖에 조각조각 전시되고 말았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의대에 진학한 뒤 의사가 되었다. 천재였던 그는 금방 영어를 배웠고 의대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힘쓰면서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여생을 쭉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다.


서광범 역시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낮에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동양의 학문을 영어로 미국에 소개하는 글을 저술하였다. 아쉽게도 그는 폐렴으로 미국으로 간지 10여 년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


박영효는 황실의 가족인 점이 참작되어 나중에는 사면을 받게 된다. 이후 그는 친일파가 되어 일본의 조선 침략에 일조하게 된다. 그가 꿈꾸던 개화는 그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다음 글에서는 갑신정변이 왜 실패했는지 분석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급진적인 일 처리방식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분석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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