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많은 사람들은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책을 보고 동영상을 보며 강의를 들으며 나를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까? 슬프게도 그렇지는 않다. 마음의 문을 닫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생각 외로 많다. "나 이대로 살다 죽을래!" 이런 자포자기식 마인드, "나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이런 교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주변에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쉽게 배울 수 있다. 그 사람 하는 것만 따라 해도 빨리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 고집 때문에, 질투심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조선 시대에도 뜻하지 않게 외부의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루하고 완고한 마인드 때문에 그 찬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사건은 네덜란드 선원들이 조선에 표류해 온 사건들로, 그 주인공은 벨테브레와 하멜이었다.
얀 벨테브레(Jan Weltevree)는 네덜란드 출신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이었다. 17세기 초, 중반 네덜란드는 세계 해상무역을 지배하던 해상강국이었다. 인도네시아 땅을 식민지화 한 이후, 중개무역을 통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물품을 실어 나르고 엄청난 부를 거둘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거점으로 동인도 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선원들을 고용했다. 당시 동인도회사 선원은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생존 확률이 극히 낮은 위험한 직업이었다. 비타민C 부족으로 괴혈병에 걸리기도 했고, 해적들을 만나기도 했다. 선상 반란도 툭하면 일어났고 폭풍우를 만나거나 현지 원주민과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3년 이상 근무한 선원 3명 중 1명은 이미 사망했을 정도로 생존율이 낮았다.
본토에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 그런 험한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자연히 마땅한 직업 없이 뜨내기 인생을 살아기던 사람들이 동인도회사 선원이 되었다. 그나마 목돈이라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벨테브레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중 하나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출발한 그의 배는 사실 무역선 겸 해적선이었다. 이를 사략선이라고 부른다. 당시 무역선은 경우에 따라서는 해적질을 같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벨테브레가 탔던 배도 그런 사략선 중 하나였다. 당시 그들은 중국 상선을 발견하고 다짜고짜 그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중국 상선을 연결하여 자카르타로 끌고 가고 있었다.
식수와 식량이 다 떨어진 중국 상선은 가까운 섬에 배를 댔다. 그 섬은 바로 제주도였다. 벨테브레와 다른 두 명의 선원은 떨어진 식량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선원들을 대표하여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한참 섬 안쪽으로 들어간 사이,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중국 상선 선원들이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밧줄로 꽁꽁 묶이고 말았다.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당시 해적질을 하다가 잡히면 거의 100퍼센트 처형이었다. 짐작건대 그들의 운명도 그리 되었을 것이다.
벨테브레 일행이 뒤를 돌아보니 정박했던 배는 이미 먼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는 그들은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한참 싸움이 벌어지던 배 안에서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섬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벨테브레가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1627년이었다. 그 해에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치렀다(정묘호란). 중국 본토에서도 명나라와 청나라가 치열하게 싸우던 격변의 시기였다.
조선에서는 그들을 명나라로 보내려고 했다. 당시 명나라는 유럽 국가들과 교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국에 명나라는 그들을 처리할 여유가 없었다. 계속 청나라에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일본에도 이야기해 보았지만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와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고 기독교 박해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일본 역시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조선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조선에서 그들은 화포를 개량하는 일을 맡았고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은 후,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까지 갖게 되었다. 10년 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이들은 모두 참전하였다. 불행히도 다른 두 명은 전사하였고, 박연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벨테브레가 조선에 온 뒤, 26년이 지난 1653년 다른 네덜란드 선원들이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이들의 대표는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이었다. 이들은 스페르버르호라는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폭풍우를 만나게 되어 배가 난파하고 말았다. 수많은 선원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고 36명의 선원들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제주도에 떠밀려오게 되었다.
이들 역시 몇 달 후 한양으로 송환되었다. 조선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이 박연(벨테브레)밖에 없었기에 그가 통역을 맡게 되었다. 박연은 이미 조선에 정착한 지 26년이나 지난 터였다. 그때 나이도 환갑을 넘긴 61세였다고 한다. 네덜란드 출신임에도 네덜란드어를 거의 다 잊어버려 첫날은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씩 하멜과 대화를 하며 다시 네덜란드어를 기억해 냈고 마침내 둘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박연은 고향 사람을 다시 만났다는 감격에 늘 눈시울을 붉혔다고 하며, 하멜에게도 아마도 당신 역시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벨테브레는 사실 일반 선원으로서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마땅한 거처나 직업이 없는 처지였다. 체념하고 조선에서 살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하멜은 달랐다. 아직 20대였고, 그는 네덜란드에서 부유하기로 손꼽히는 건축가의 아들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게 당연했다.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끝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들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네덜란드의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 최강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무기나 항해술에 있어서는 영국과 더불어 최강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하멜 일행 중에서는 대포 등 무기 제조술이나 항해술을 보유한 인재들이 있었다. 배워서 활용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하멜 일행이 혹시라도 청나라에 붙어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경계했다. 사실 그 경계에 근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멜 일행이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나라 사신단이 조선을 방문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하멜 일행 중 두 명이 갑자기 청나라 사신이 행차하는 길을 가로막고 제발 우리를 고국 네덜란드로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위험인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한양에 두면 안 되고 지방 먼 곳에 귀양살이를 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라도 지방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3년 간이나 그들은 그렇게 활용가치 없이 버려진 것이다. 그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는 병자호란 이후 시기였고, 경신대기근이라고 불리는 참사가 서서히 조선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구걸을 다니기도 하고, 대감집 잔치에 가서 서양식 춤을 추고 약간의 돈을 받아서 근근이 살아갔다고 한다.
이들의 운명은 당시 전라 좌수사가 누구인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이들은 전라도 지방 해군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 이도빈이라는 좌수사는 이들에게 극진한 호의를 베풀었다. 노역을 부과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네덜란드어까지 배우기도 했다.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제안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심하게 노역을 시키거나 툭하면 괴롭히는 성질 고약한 좌수사를 만나면 고생을 해야만 했다.
외로운 처지였지만 이들은 근처 사찰의 승려들과 매우 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 탓에 승려들은 차별을 받고 있었다. 같이 차별받는 처지이다 보니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네덜란드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음식도 나누고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억류된 지도 어느덧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처음 36명이었던 일행은 어느새 22명으로 줄어 있었다. 청나라 사신들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했던 두 명은 처형되었고, 그 외 병이나 사고로 14명이 낯선 조선 땅에서 죽게 된 것이다.
남은 22명은 여러 그룹으로 나눠져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주로 짚을 꼬아 밧줄을 만들거나 짚신을 만드는 일을 했다. 천민에 해당하는 갖바치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하멜은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같이 사는 다른 7명의 동료들에게 생각을 이야기했다. 동료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향이 그리웠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의 비밀 계획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건 엄청난 모험이었다. 붙잡히는 순간 그들은 죽음을 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배로 파도를 헤치고 일본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폭풍우를 만날 수도 있었고, 일본으로 가는 방향을 정확히 알아내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모험을 선택하였다.
가장 먼저 인근 어부들에게 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어부들은 선뜻 배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진 재산은 전부 털어 시세의 2~3배 가격을 주고 배를 사들였다. 항해사 출신 동료는 지도를 보면서 뱃길을 찾기 시작했다. 식량과 물도 계속 모아놨다. 물고기를 잡는 척하고 수시로 배를 몰고 바다에 나갔다. 그러고는 기상 상황을 체크하며 점점 인근 바다에 익숙해져 갔다.
1666년, 마침내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출발했다. 철저하게게 준비를 했던 덕택인지 그들은 8명 전원이 무사히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과 네덜란드는 다시 사이가 좋아진 터였다. 그들은 일본 정부에 그들을 네덜란드로 보내줄 것과, 조선에 억류된 나머지 동료 8명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 정부는 나가시키에 있는 네덜란드 관청에 그들을 보냈다. 또한 조선 정부에도 압력을 가해 나머지 8명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때까지 조선은 하멜 일행이 탈출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조선 입장에서도 이들이 딱히 활용가치가 없었기에 돌려보내기로 합의한다. 그중 한 명이 갑자기 사망하며 남은 7명이 일본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15명의 생존자들은 모두 무사히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 온 지 무려 13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6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존자 22명 중 15명이 돌아갔고 한 명은 사망했으니 여전히 6명이 남는다. 생각건대 이들은 이미 조선 여인과 결혼 후 이 땅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조정에서 남 씨 성을 하사 받은 것을 근거로 하여 이들의 후손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300년 넘는 시간이 흘렀기에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멜은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 하멜 표류기를 썼다. 조선에 가게 된 이유, 조선에서의 삶, 조선의 풍속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이 책은 17세기 조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물론 조선에 대해 그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차별받고 고생했던 그 한이 서려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미신에 심취해 있으며, 조선에서 여자는 사람이 아닌 가축 수준으로 취급받는다는 등 곳곳에 조선을 비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사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13년 간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서였다. 선박 회사에서는 그들에게 급여를 일체 주지 않았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열여섯 명에 대한 13년 치 봉급이니 지금 시세로 계산하면 1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을 것이다. 하멜은 급여 청구를 위한 증빙자료로 이 책을 쓴 것인데, 하멜 표류기는 유럽 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무려 1885년까지 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멜은 그 뒤에도 선원 생활을 계속 이어가다 62세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선원들이 수 십 명씩이나 조선에 우연히 몰려들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네덜란드의 기술을 배울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말았다.
반면 일본은 달랐다. 네덜란드와 교역을 적극적으로 유지했고,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라고 하는 섬을 상시 교역창구로 개방하였다. 일본은 당시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의 학문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를 기초로 해부학 등 의학을 발전시켰고, 출판도 발전시켰다. 당시 조선 통신사가 일본은 방문하여 말했던 내용은 불과 일주일 만에 일본에서 책으로 출판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은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던 것일까?
조선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사농공상 체제에서 기술은 상놈들이나 다루는 천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저 농사나 잘 지으면 되지 그 이상의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19세기 철학자 막스 베버는 동양을 두고 '공간만 있고 시간은 없는 곳'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활수준 변화는 거의 없이, 똑같은 공간에서 사람만 죽고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동양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지만, 적어도 조선에는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었다.
기술을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이 없으니 이들을 활용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잔치에서 흥을 돋우는 광대로, 노끈을 꼬거나 노역을 하는 역할 외에는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라도 이들을 활용해서 기술을 개발하고 군사력을 키우면 청나라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아시아 최강국으로 떠오른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약소국인 조선 입장에서는 행동 하나라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 눈치 보느라 군사력을 키우기는 어려워다면, 생활에 이로움을 주는 기술이라도 충분히 개선할 수 있었는데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일단 단일민족에 대한 환상이 너무나 강했다. 나랑 다른 외모나 언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적대시했다. 포용하고 수용하는 열린 사고를 갖고 있어야 했는데, 외부와의 교류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사회에 이런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조선 사람들에게 이들은 그저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러니 교류가 거의 없을 수밖에 없었다. 신분제 하에서 양반들은 그들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벨테브레와 하멜의 표류 사건은 단순히 낯선 이방인들이 이 땅에 왔던 사건이 아니다. 왜 조선이 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사건이다. 기술을 천시하고 외부에 배타적이던 조선은 결국 200여 년 뒤, 서구 문명을 적극 받아들였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건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서도 문을 걸어 잠그고 새로운 사람이 오면 배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들끼리 패거리를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서 이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히 따돌리고 배척한다. 모 대기업은 그들의 자녀들이 입사 지원을 하면 가산점을 줘야 한다는 노조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기들끼리 모든 것을 다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이들은 배타적이다.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는데 무슨 기술이 더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좀처럼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회사는 결국 로봇을 도입하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한다. 이런 직원들 데리고는 도저히 성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낯선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거부감을 갖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배울 점을 찾아 적극 수용하는 사람이 발전하게 된다. 로마는 그리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켰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을 포용하며 전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열린 자세는 나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