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못러에서 벗어나기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팀장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우리 교육비 예산 남은 게 얼마지?"
"2,000만 원 정도 남았습니다"
"한 달에 얼마 정도 교육 신청이 들어오는데?"
"대략 1,000만 원 정도 됩니다"
"응? 아직 내년까지 넉 달이나 남았는데? 그러면 2,000만 원이 펑크 나는 거잖아. 앞으로 교육신청 들어오는 거 일단 못 간다고 다 막아버려"
"그러면 회사 사람들 반발이 엄청 날텐 데요. 차라리 사정 이야기하고 교육예산 추가로 확보하심이.."
"아.. 그냥 다 막으라니까? 돈 없어서 못 간다고 하면 쪽팔리니까 다른 그럴듯한 이유 대면서 최대한 막아보라고"
당시 나는 욕받이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회사일 잘하려고 듣는 외부교육인데 무조건 다 못 가게 하고 교육비 지원도 한 푼도 안된다고 하니 반발이 엄청났던 것이다.
대놓고 돈 없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일단 안된다고 말을 해야만 했으니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어떤 때는 전화기를 무음으로 하고 아예 전화를 안 받기도 하였다. 감정소모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것은 팀장의 태도였다. 세상 좋은 사람처럼 대응하는 것이었다. 항의가 종종 팀장에게 쏟아지면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제가 담당자에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말만 할 뿐이었다. 지시는 자기가 내려놓고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었다. 나만 바보가 되는 상황이었다.
이럿듯이 앞에서는 좋은 소리만 하고, 뒤에서는 밑의 직원들에게 온갖 갑질에 욕먹기 좋은 궂은일만 시키는 리더들이 있다. 잘해야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욕이 쏟아진다. 직원들은 욕먹지 않기 위해 그저 소극적으로 업무에 임하게 된다. 리더는 외부인들에게는 좋은 이미지로 인식된다. 밑의 직원들의 고충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즉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는 싫고, 좋은 이미지는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럴 염려가 있는 일은 밑의 직원들을 은밀하게 시킨다.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유형의 일들이 회사 사람들에게 욕먹기 딱 좋을까? 그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들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기존에 주기로 했던 혜택을 줄이거나 박탈하는 것, 추가로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것, 남에게 거절해야 하는 일 등 불편함이나 손해를 주는 일은 싫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런 일들은 그 누구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욕먹기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을 못한다고 취급받는 만만한 직원이 이런 욕먹는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싫은 소리 잘 못하고 그냥 묵묵히 참고 일하는 사람들이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시키는 사람도 지시받을 사람을 가려가며 시키기 마련이다. 불평불만이 적게 나올 사람에게 이런 일이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입사원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시키는 일은 군소리 없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감당하기 힘든 업무가 주어지게 되면 몸과 마음에 병들기 쉽다.
감정 소모가 필요한 일을 도맡아 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과 평가를 받아야 합당하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힘은 들지만 난이도는 낮은 업무로 평가되기에 욕은 욕대로 먹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지만, 그에 맞는 평가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절대 안 된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일이 자꾸 나에게 떨어진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이 리더가 앞으로 나서지 않는 채 총알받이로 나를 내세우게 된다면 이건 비열한 일이다. 회사 내 평판에도 문제가 생기고 업무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처음 사례에서 교육비 예산이 부족하다면 그건 리더가 상부에 보고하고 추가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상부에 아쉬운 소리 하는 게 싫다고 교육을 못 듣게 한다면 그 부서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막을 수 있는 교육과 그렇지 않은 교육을 나눠서 일단 내가 막기 힘든 교육은 추가 예산을 확보해 달라고 부탁하자.
내가 할 수 없는 부분까지 총대 메고 하지 말자. 특히나 불합리한 일이라면 더더욱 맡아서는 안 된다.
상대방은 전후사정도 모르고 무조건 나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전후사정을 충분하게 설명하자.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상부 지시 때문에 이런 것이라고 말이다.
안 그러면 나만 중간에서 욕 얻어먹는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닌데 혼자서 손가락질을 다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내가 속한 부서의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게 밝히자.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이다.
리더에게 이야기하여 혼자서 하지 말고 이번 일을 분담하고 싶다고 말하자. 싫다는 것을 간접적이고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계속 나에게 집중된다면 남에게 좋지 않은 소리 듣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하자. 의외로 리더들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직접 본인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받아야 하는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주장하자. 감정노동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면 당연시 그에 맞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싫다면 애초에 나에게 그런 업무를 주면 안 된다. 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자.
비운의 왕세자인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를 알 것이다. 영조는 수시로 사도세자에게 직접 통치해 보라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맡기는 업무는 주로 죄인을 앞에 두고 취조하고 고문을 가하는 국문인 경우가 많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해야 하고 미움받기 딱 좋은 그런 업무를 아들에게 휙 던진 것이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게 된 것은 영조의 책임이 크다.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업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요즘은 블라인드 같은 익명 커뮤니티가 있기에 자칫하면 내 이름이 오르내릴 수도 있다. 여러모로 나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큰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업무를 할 수밖에 없다. 나라고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싫은 업무가 나에게만 집중된다면 그건 큰 문제이다. 분명하게 선을 긋고 내가 힘든 것을 리더에게 이야기하자. 그리고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내 권리는 내가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