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업무지시, 꾸준히 증거자료를 모읍시다

부당한 지시에 대처하는 방법

by 보이저

어느 날 팀장이 조용히 나를 회의실로 부른다.


"주 대리, 이거 비밀 철저하게 지켜야 해"


무슨 일일까..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팀장은 밖에 들릴세라 조용히 말을 건넨다.


"부사장님 아내분이 백화점에서 니트와 바지를 샀는데 결제를 해야 하나 봐. 바쁘다고 대신 결제 좀 해달라고 그러더라고. 부사장님 카드 줄 테니 주 대리가 대신 잠실 롯데백화점 가서 결제 좀 하고 와"


아니.. 부사장 개인 심부름 하러 그 멀리 잠실까지 다녀오라고? 지금 제정신인가? 내가 부사장 개인비서인가? 비서한테도 이런 사적 심부름은 시키면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차마 가절할 수 없어 카드를 건네받기는 했지만 영 기분이 나쁘기만 하다.


혼자 투덜거리며 주 대리는 1월 칼바람을 맞으며 잠실 롯데백화점으로 향했다. 뭔가 증빙을 남기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 심부름을 시키는 부사장, 그걸 또 넙죽 받아 들고 오는 한심한 팀장.. 둘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환장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너무나 짜증 나고 억울했던 주 대리는 결제 후 옷가게 매장을 배경으로 하여 부사장 카드와 함께 영수증 사진을 찍었다. 인증숏인 것이다. 물론 이걸 가지고 고발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나중 일을 대비해서 부당한 지시에 대한 증거자료를 남기고 싶은 주 대리였다.




내가 겪었던 부당한 업무지시 사례들


위 사례는 실제 내가 겪었던 일을 각색한 것이다. 저 증거자료를 실제 사용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어 번 예시로 들었던 신입사원 시절 전무 이야기를 다시 해보려고 한다. 이 사람은 기상천외한 심부름으로 아주 악명이 높았다. 어느 날 팀장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매일 아침 회사 앞 정문에서 김밥 한 줄을 포장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김밥이 특이했다.


참치김밥 2개, 멸치김밥 2개, 치즈김밥 2개..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줄을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전무님이 다양한 맛의 김밥을 맛보고 싶어 해서 그런 김밥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김밥을 포장해서 아침 출근길에 들고 오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전무의 황당한 지시는 이것 하나뿐이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TV 기상캐스터가 요즘 보이 지를 않는다고 방송국에 전화해서 근황 알아보게 한 일, 자기는 노란색 벽지가 좋다고 숙소 벽을 직원들 시켜서 노란색으로 도배하게 한 일, 영덕게가 갑자기 먹고 싶다고 경상북도 영덕항에 가서 영덕게 사 오게 한 일..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심부름을 직원들에게 시키고는 했다.


요즘 시대에 그딴 식으로 행동했다가는 큰일 났을 것이다. 예전처럼 부조리에 직원들이 그저 참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여전히 직원들을 개인 비서로 생각하고 부려먹는 리더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부당한 업무지시를 내리는 이유


리더 중에는 자기 자리를 권력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은 대접받아야 하고, 부하 직원들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리더들은 과연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1. 특권 의식과 선민사상


부당한 업무지시를 자주 내리는 리더들은 자신의 지위를 권력으로 착각하고는 한다. '내가 이만큼 높은 위치에 있으니, 이 정도 편의는 제공받아도 된다'는 특권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들은 직급을 업무적 역할이 아닌 '신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짧은 메시지로 전해도 되는 일을 보고서로 만들어서 정식으로 보고하게 한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써오라고 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자기 책, 사무용품, 비용까지 대신 결제하고 비용처리까지 떠넘긴다. 그들은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2. 경계 설정 능력의 부재


공적인 업무 관계와 사적인 관계의 선을 긋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이다. 특히 한국 특유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 조직 문화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정서적 유대감을 무기로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이다.




3. 통제 욕구


단순히 심부름이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심리이다. 사소한 개인사까지 시켰을 때 상대가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인하며 안도감을 느낍니다.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가진 리더들이 특히 많이 보이는 특성이기도 하다.




4. 과거 경험의 답습


본인이 신입 시절에 상사의 개인 심부름을 하며 성장했던 경험이 있는 경우이다. 이를 '통과 의례''사회생활 기술'로 정당화하며, 자신도 똑같이 대물림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라테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자기는 더 힘든 일도 겪었다는 식으로 이런 심부름을 정당화한다.




부당한 업무지시가 미치는 악영향


그렇다면 이런 부당한 사적 업무지시는 직원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게 될까? 시키는 사람은 '뭘 이 정도 가지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예상외로 부당한 업무지시가 미치는 악영향은 매우 크다.



1. 심리적 위축과 정신적 고통


전문 역량을 발휘하러 온 직장에서 상사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수행하게 되면 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거부하고 싶지만, 지시를 거절했을 때 돌아올 인사상 불이익이나 직장 내 따돌림에 대한 공포로 인해 지속적인 불안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2. 직무 몰입도 및 생산성 저하


공적인 업무 시간과 에너지가 사적인 일에 낭비되면서 본연의 업무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적인 업무 지시는 보통 예고 없이 발생하며, 이는 직원의 집중력을 분산시켜 업무 효율을 급격히 떨어뜨리게 된다.


가뜩이나 바쁜데 본래 업무에 사적 업무까지 더해진 과도한 노동 강도는 결국 육체적, 정신적 탈진을 야기하게 된다.




3. 조직 충성도와 신뢰의 붕괴


이런 사적인 지시하는 리더가 존경을 받을 리 없다. 리더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면 조직 전체의 결속력이 무너지게 된다. 일 잘하는 사람보다 수발 잘 드는 사람이 인정받는다는 인식이 퍼지면,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성과를 위해 노력하지 않게 된다. 조직문화가 손상되는 것이다.


유능한 인재일수록 불합리한 조직 문화를 견디지 못하고 가장 먼저 떠나게 된다.




4. 윤리적 마비와 관행으로 인식하기


부당한 지시가 반복되면 조직 내에서 이를 당연한 관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급자들은 나중에 본인도 권력을 가지면 똑같이 행동해도 된다는 잘못된 보상 심리를 갖게 될 수 있다.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 군대에서의 얼차려 문화는 가해자들이 신입이었던 시절 당했던 것들을 그대로 되돌려주려는 데서 발생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문화에 젖어들게 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부당한 업무지시에 대응하는 방법


그렇다면 이런 문화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냥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참고 지내는 것이 능사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참는 것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아래 방법들을 추천드린다.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이 다치는 것을 최대한 막는 방법들이다.




1. 업무 우선순위를 내세우기


가장 완곡하면서도 논리적인 방법이다. 상사의 지시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업무가 지연될 것임을 우려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부장님, 지금 요청하신 일을 바로 도와드리고 싶지만, 현재 지시하신 이번 달 결산 보고서를 마감하느라 시간이 빠듯합니다. 이 업무를 먼저 끝내고 처리해도 괜찮을까요?"


이렇게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업무가 우선임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시킨 공적인 업무가 틀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본인도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기에 상사는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조심하게 된다.




2. 모호한 거절로 불편함 전달하기


매번 즉각적으로 응해주면 상사는 이를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게 된다. '얘는 이런 일 시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구나' 이렇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수행 불가능함'을 완곡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불편함을 살짝 내비치는 것도 효과적이다. 사적인 업무를 지시하는 메시지에 10분 정도 간격을 두고 "알겠습니다" 이렇게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점심시간에 은행 업무가 예약되어 있어서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퇴근 후에 바로 부모님과 저녁식사 약속이 있어서 그 심부름은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항상 가능한 사람이 아니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심부름의 빈도를 줄일 수 있다. 뒤에서 불만 어린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무시하자. 그런 소리까지 일일이 다 의식하면 직장 생활하기 힘들다.




3. 관련 사실 증거 확보하기


만약 사적인 심부름이 반복적이고 강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한다. 날짜, 시간, 장소, 상사의 구체적 지시 내용, 당시의 상황을 메모장이나 이메일(나에게 보내기 활용)에 상세히 적어두자. 사진이나 음성 녹음을 통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이는 나중에 인사팀 면담이나 감사팀 제보 등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필요한 상황에서 강력한 증거가 된다.




4. 익명 게시판 활용하기


요즘 블라인드와 같은 익명 게시판이 활성화되어 있다. 리더들이 민감해하는 것이 바로 익명 게시판이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내 비리를 폭로하는 글이 올라오면서 공분을 일으키게 되고 감사가 진행되면서 처벌로 이어지는 사례들도 여럿 있었다.


익명 게시판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뜨겁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를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비겁하게 사적 심부름을 강요하는 사람에게 언제까지 정공법만 쓸 것인가? 기습공격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최근 모 국회의원과 장관 후보자의 갑질 논란이 있었다. 한 명은 탈당해야 했고, 다른 한 명은 장관직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이 사건들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갑질을 당한 보좌관들이 그 폭언을 하는 상황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녹취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들이 더 이상은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신입사원 때만 해도, 김밥을 종류별로 아침마다 포장해서 전무에게 갖다 바쳐야 했고, 일하다가 뜬금없이 경북 영덕으로 가서 영덕게를 사 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침묵해야만 했다.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원 친인척 장례식이 있으면 직원들이 동원돼서 2박 3일 내내 손님들 수발들며 밤을 새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세상이 아니다. 사적인 심부름시키는 리더는 리더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리더가 무슨 제대로 된 판단능력을 갖고 있겠는가? 이런 리더에게 들이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정중히 거절하거나 양해를 구하자. 그리고 그런 지시가 계속된다면 증빙자료를 차곡차곡 모으자.


나 역시 그런 지시를 받으면 사진을 다 찍고 있다. 카드번호, 매장, 영수증 등등 증거가 될 수 있는 것들, 지시내용이 담긴 메신저 내용은 다 캡처해서 개인폴더에 저장하고 있다. 아직 이 파일들을 폭로전에 활용한 적은 없지만, 이런 자료들은 만일의 상황 때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된다.


부디 참지 말고 대항하자. 힘 대 힘으로 싸우지 말고 조용히 내 의사를 전달하고, 증거자료를 모으자. 시킨다고 참고 다 하면 하는 사람도 바보임을 명심하자.

작가의 이전글가장 취약한 순간이 위험합니다 (1.21 사태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