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prologue

by 하소초

곧 큰애가 돌아올 것이다. 오후가 되었으므로.


어수선한 주방과 지난밤 개어두지 못한 빨래들을 외면하며 나는 조바심친다.


어린이집 행사로 작은 애의 등원 시간이 늦어져 가뜩이나 깎여나간 오전이, 별수 없이 병원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결국, 송두리째 날아갔다. 왜 하는지 모를 주사 치료를 받고, 이건 또 왜? 싶은 물리치료를 받은 뒤 처방전을 든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자니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 사람들은 벌써 절반의 하루를 잘 살아냈구나. 다양한 병원이 들어선 상가라 유니폼도 제각각이었는데,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끼리 재잘대는 모습이 마치 교복 입은 학생들처럼 보여 나는 괜히 학교 밖으로 소외된 청소년처럼 기가 죽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자기 몫의 일을 하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오전 내 견디던 긴장에서 해방된 표정을 주고받으며 들뜨고 안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되게 깨어나 아침을 차리고 말 안 듣는 애들을 다독여 먹이고 보냈다. 내 기분이나 표정은 물론이고, 주방과 욕실, 식탁과 서랍장의 일처리에도 영향받는 아이들을 보면 그 사소한 매일의 무게가 새삼스러워 주제넘은 책임을 용케도 맡았다 몸서리치기도 한다. 나도 내 몫의 일을 하고 있지, 그럼.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픈 다리를 절뚝이며 집에 돌아와, 약을 먹어야겠으므로 아이들이 아침에 남기고 간 것들을 먹는다. 가능하면 일찍 돌아와 오전의 귀퉁이라도 즐기고 싶어 상을 치우지 않고 갔는데 덕분에 새로 차릴 필요가 없어 수월했다.


다 먹고 나니 양이 좀 모자라 뭘 좀 더 먹을까 하다가 덜 먹을 기회다 싶어 관두기로 하고 물을 따라 약을 먹는다. 진통제를 두 종류나 줬다. 하나는 기본으로 먹고 따로 포장한 노란 약은 통증이 심해지면 먹으란다.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므로 마음 같아선 둘 다 먹고 싶었지만 차이를 알고 싶어 기본만 털어 넣는다. 마침내 약을 먹고 나니 이제 다 끝났나? 싶어 머엉해진다. 어젯밤 세탁기 앞에서 꾸벅꾸벅 졸며 읽던 책을 집어 들고 마저 읽을까 하다가 집중이 안 될 것 같아 내려둔다.


이런 상태로, 뭘 하려고 하지 말자.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우선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약을 먹었으니 통증이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아깝다. 가만히만 있는 것은 낭비지. 하며 스윽 TV를 켠다. OTT 콘텐츠를 쳐다보는 것엔 별 집중력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러나 자꾸 대사를 놓쳐 되감아 보는 것을 깨닫고 TV를 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하려 했던 일들을 하자. 어차피 좋은 컨디션은 오지 않는다.


그렇게 절뚝이며 컴퓨터 앞에 와 앉아 외장하드에 미뤄둔 일들을 이거 저거 찍어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탈해하다 보니 학교종이 앱의 알람으로 핸드폰이 밝아진다. 종례를 마친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내일 시간표와 과제를 입력한 것이다. 아이를 잘못 닦달하면 학부모의 항의를 받을 수 있으므로 학교는 아이들에게 전달할 사항을 학부모에게 직접 통보한다. 아이들에게 이미 전달한 사항도 물론 통보한다.


그러므로 아이가 학교 일정을 놓치거나 필요한 준비를 잊으면 별수 없이 절반은 나의 책임이 되었다. 기타 교내 행사와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면 좋을 만한 지역 행사도 나는 알려줬다는 듯이 빠짐없이 보내주기 때문에 하루 대여섯 번은 알림이 울린다. 대부분이 무용한 그것들은 또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어 나는 덫에 걸린 듯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한다.


곧 지금 끝났다며 큰애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다. 입학한 지 며칠 안 된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방과 후 선생님의 실수로 어긋난 뒤 4학년이나 돼야 사주려던 핸드폰을 곧장 사주었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전화하는 것은 그 뒤로 쭉 이어온 루틴이다. 아이는 이미 4학년이었으므로 이 루틴은 이제 본래 계획에도 부합하는 일이 되었다.


전화를 받으면 아이는 작지만 깜짝 놀랄 탄성으로 어디로 튀는지 모를 마음을 탱탱 울려댈 것이다. 환한 목소리로 답해 주어야 하는데, 오늘은 왠지 마음이 환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가 갔다. 학교를 마치고 온 아이에게 간식을 챙겨주고, 작은 애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남은 하루가 이어질 뿐이다.


남은 하루가 이어질 뿐이다.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준비해 아이들과 나눠 먹고, 상을 치우고, 음식물 쓰레기와 젖은 쓰레기를 모아 버리고, 입이 짧은 큰애에게 지인을 통해 싸게 구매한 한약을 먹이고, 먹어라 먹어라 애원을 해가며 겨우 먹이고, 둘째를 씻기고, 밥 먹을 때부터 쉬지 않고 보는 패드의 영상을 이제 좀 그만 보라 말리고, 나 이 닦는 동안까지만 보라고 유예 기간을 주고,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면 아이들과 함께 누워야 한다.


함께 눕지 않으면 좀처럼 자지 않기 때문이다. 윽박을 질러 너희들끼리 자라고 몰아넣은 적도 있었지만 풀이 죽어가면서도 미어캣처럼 벌떡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이기지 못해 결국 같이 눕기 시작했다. 얼른 재우고 아이들이 잠들면 그때 일어나 뭐라도 해봐야지- 해봤자, 소용없는 것이다. 나부터 코를 골기 시작할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체력에 버겁다.


전화가 울린다. 환한 마음은 아닐지라도 우웅 우웅 울리며 화면을 가득히 채우는 아이의 얼굴이 안쓰러워 오래 망설이지 못하고 전화를 받는다. 7교시라고 했던가. 아님 그저 가을이라 그런가.


벌써 해가 많이 기울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