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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추리우먼 Apr 05. 2022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느낌 있는 일상


대학 입학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취직 시험에 합격했을 때, 결혼 후 첫아이가 탄생했을 때, 승진 시험에 합격했을 때 등등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결정적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친했던 대학 친구들은 졸업하면서 한 명 한 명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대학원에 진학해서 고독한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첫 학기 봄부터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 시간강사도 했고, 여름방학 때는 독일 대학에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겨울방학 때는 중공업 회사에서 독일인 기술자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내 전공은 독어 독문학이다. 한때는 독일 대학 학비가 면제라 독일어 붐이 일었고, 유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대학원 3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난 논문 주제를 어떤 걸로 할지 고민을 하면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내가 유학 이야기를 했을 때 몇 년이 걸리느냐, 다녀와서 무얼 하느냐 등등을 물었다. 난 독일 가서 공부해서 통역사가 되겠노라며 호탕하게 말했다. 4학기가 되어 논문을 마무리해야 하는 데 자료 찾아서 원고 쓰고 수정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물론 내가 능력이 모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논문 자체를 쓰는 게 정말 재미가 없었다. 어찌어찌 논문은 마무리되었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제 유학만 가면 되는데 딱히 어느 학교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해 가을 엄마는 신장이 안 좋아져서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언니 오빠들은 결혼했으니 백수건달인 내가 보호자가 되어 한 달 동안 엄마를 간호했다. 엄마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못 받으면 혈액투석을 시작해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결국 엄마는 퇴원했고 가까운 병원에서 혈액투석을 시작했다. 언니는 병원에 갈 때 운전을 하고 나는 엄마 간호에 식사에 집안 살림까지 챙겼다. 유학을 목표로 했던 나는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아픈 엄마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엄마가 편찮으신데 내가 과연 유학 가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고민이 되었다.



겨울이 되자 엄마는 어느 정도 일상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난 야간 고시학원에 등록했다. 아침과 낮에는 엄마 간호와 살림을 하고 저녁 6시가 되면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11시가 넘어서 집에 왔다. 3개월 과정이 끝나고 이듬해 봄부터는 아침반에 등록했다. 시험 공고나 났을 때는 새벽 6시에 집을 나섰다. 시간 절약을 위해 난 새벽마다 택시를 타고 가서 학원 지하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정규 수업을 듣고 야간에는 문제 풀이 반에 들어갔다. 4월에 교육행정 9급 공채시험을 보고 5월에 면접을 보고 6월에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났고 학원 게시판에 내 수험번호가 붙었다. 내가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엄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엄마가 입원하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내가 유학을 다녀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합격자 발표가 나고 엄마가 다니는 절에 보살이 소개하여 지금의 남편을 만나 100일 만에 결혼했다. 시어머니와 엄마는 같은 절을 다니는 불자들이었다. 난 가을에 결혼식 올리고 이듬해 봄에 첫 발령을 받았고, 그 이듬해 2월에 큰애를 낳았다. 3년 뒤에 둘째를 낳고 발령 5년 만에 7급이 되었다. 엄마는 내가 첫애 돌잔치를 한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난 엄마의 병실을 지켰다. 새벽에 쇼크가 왔고 엄마는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10일 만에 돌아가셨다. 유학을 꿈꾸었던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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