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컨추리우먼 Apr 04. 2022

내가 갖고 싶은 명함

25년 차 직장인


큰애가 고등학교 시절 난 학부모회에 가입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부모회 활동하기란 쉽지 않지만, 큰애의 입시를 위해서 조금이나마 학교와 유대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학부모회는 규모도 크지 않았고 주로 하는 일이 학교 시험 기간에 복도 감독 봉사활동과 급식 모니터링이었다. 난 직장을 다녀야 하니 급식 모니터링은 어렵고, 시험 기간 복도 감독은 몇 번 갔다. 조용한 복도에 서 있다가 감독 선생님이 답안지를 달라고 하면 복도에 계신 선생님께 가서 답안지를 받아서 전달하는 일이었다.


아이가 2학년이 되어 학부모회도 2학년이 되었다. 학기 초 학부모 총회에 갔더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학부모회 임원들은 학년별로 가끔 모였다. 점심시간에 외출하여 밥도 먹고 돌아가면서 점심을 사주기도 했다. 그해 가을에 몇몇 친한 임원들이 곱창을 먹고 2차로 재즈 카페에 갔다. LP 레코드판이 엄청 많은 그 카페 이름도 ‘올댓 재즈’였다. 우린 그 집에서 기념사진을 찍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명함이 없다는 말을 듣고 학부모회 기념 명함을 만들어보자고 내가 제안을 했다. LP 진열장을 배경으로 세 명의 여인들이 서 있는 사진을 깔고 명함을 제작했다. ‘00 여고 학부모회 부회장 000’이라 쓰고 핸드폰 번호를 넣어서 찍은 명함은 지금도 일부 간직하고 있다. 나야 직장인이라 명함이 있지만, 그분들은 전업주부라 명함이 없었던 차에 내가 준 명함을 받고 아주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명함은 그 사람의 얼굴이라고 한다. 보통 회사명과 직함과 이름이 적힌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데 진짜 내 명함은 무엇일까 고민한 적이 있다. 작년 가을 난생처럼 내 책을 썼을 때, 책날개에 저자 소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여졌다. 내 블로그에는 ‘25년 차 직장인, 두 딸의 엄마, 요리 잘하는 남편의 아내, 읽고 쓰고 그리는 여인’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책날개에는 그런 말을 다 쓸 수 없었다. 난 두 가지로 압축을 했다. 하나는 ‘25년 차 직장인, 고등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합니다.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은 아니라는 모토로 오늘도 신나게 출근합니다.’라고 써봤고 또 하나는 ‘25년 차 직장인. 책을 좋아하고,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책을 사는데 주머니 사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책 덕후입니다. 책을 소개하는 코너라면 어떤 매체든 사랑하며 새 책을 아는 즐거움에 날마다 신나는 아줌마입니다.’라고 썼다.


사실 지금도 난 달마다 20만 원 이상 책값을 지출한다. 누군가 책 소개를 하면 손가락 촉이 움직인다. 얼른 주문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구하기 힘든 책이나 빨리 받고 싶으면 인터넷 교보문고로 총알 배송 요청을 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동네 책방 3곳을 돌아가며 주문한다. 동네 책방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손 포장이다. 어떤 책방은 예쁜 글귀가 쓰인 명함을 넣어주고, 어떤 책방은 과자나 초콜릿 같은 간식을 넣어준다. 또 다른 책방은 쿠키를 선물해준다. 내가 책을 읽는 속도는 집에 쌓이는 책 높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독서 토론용 도서는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니 진도를 뺄 수 있는데 책 소개를 보고 호기심에 산 책은 순서가 뒤로 밀린다. 그러다가 쌓인 책을 몇 달 만에 정리한다. 책꽂이로 보내고, 책장으로 보내고, 책상 위를 널찍하게 비운다.


내가 갖고 싶은 명함은 ‘책 덕후 000’, 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읽고 쓰는 여자 000’라고 제작해야겠다. 여하튼 책은 나의 삶이요, 사랑이요, 인생이다.

작가의 이전글 불금엔 와인 한 잔? 난생처음 와인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