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때
25년 차 직장인
살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 왔지만 ‘거절’이라는 걸 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나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날이 흐리면 어디선가 전화가 온다. ‘오늘 한잔 어때?’ 난 그런 전화를 받으면 반색하며 ‘장소를 어디로 할까요?’라고 묻는다.
한때 모임의 여왕이라는 말을 들었다. 직장에서 승진한 뒤로 세상이 너무 따뜻하고 무얼 해도 기분 좋았던 시절에 다양한 모임 총무 내지는 리더를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동기들 모임, 승진 기수 모임, 여성 관리자 모임, 부부 동반 모임, 독서 모임 등 다채로운 모임을 잘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모임이 잘 운영되려면 우선 회비를 잘 걷어야 한다. 돈이 있어야 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요직을 차지한 선배들을 섭외해야 한다.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모임이 잘 유지된다. 모임의 핵심은 연락 총무와 회계 총무를 꼭 두어야 한다. 주기적인 만남을 유지하려면 소통이 제일인데 회원으로서 존재감을 부각해야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모임에서는 거절이라는 걸 모르는데 업무로 돌아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부서 간 업무 협의를 하다 보면 ‘그건 저희 팀 소관 업무가 아닌데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학교 급식팀’이라는 팀 명칭 때문일까? 사람들은 급식의 기역 자만 나오면 다 우리 팀 소관이라고 밀어붙인다. 학교급식의 대상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학기 중 중식이다. 자칫 내가 애매한 업무를 가져오면 팀원들이 곤란해지고 현장에 혼선을 준다. 업무에 대한 전화를 받거나 협의할 때 난 즉답을 피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소관 업무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거절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거절로 받아들인다. 업무로 만난 조직인데도 거절하면 그 사람 자체를 원망하게 된다. 그 여파는 다른 업무를 할 때 나타난다. 예전에 나한테 거절한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거절해야지’라며 소심하게 보복한다. 사람들은 주변의 평판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가 어땠더라’라는 카더라 통신이 솔깃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여러 번 보았던 드라마 <미생>에는 소심한 대리가 등장한다. 다른 부서 신입 직원은 그 대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팀 과장님이 말씀하시기를 대리님은 누구보다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분으로 배울 점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리는 눈이 똥그래지면서 “그래요? 그리고 또 다른 말은 뭐라고 하셨나요?”라며 급 관심을 보인다. 소심했던 대리는 그동안 말로만 좋게 이야기하다가 거래처에서 납품 지연한 사태를 원칙대로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평소 그를 알던 사람들은 놀랐고 소신을 밝힌 대리는 명확하게 업무 처리한다.
시중에는 ‘거절’에 대한 다양한 책이 존재한다. 그만큼 거절은 힘든 일이면서 꼭 필요한 행동이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싶겠지만 능력이 안 되면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 내 소관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적당한 거리 두기와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