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드로잉
맞다. 완성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먹을 때는 포도송이를 씻어 접시에 올리기가 무섭게 알알이 따 먹고 또 한 송이를 먹고 싶어 지는데. 세상 쉬운 게 포도 먹는 일이었는데, 막상 그려보려니 그 많은 포도알이 탁구공이 되어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밑그림 그릴 때만 해도 꿈이 야무졌다. 그림에 칸을 나누어 선을 그리고 칸칸이 포도알을 따라 그렸다. 딸들과 카페에 앉아 차도 마시면서 포도알을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명암까지 선을 그었다. 나란 사람 역시 ‘하면 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이제 명암만 넣으면 된다. 명암은 1부터 5까지 연하게 시작해서 진하게 끝내야 한다.
선생님과 줌 수업으로 만났다. 내가 가운데 포도에 명암 넣은 그림을 보시더니 그러지 말고 좌측 위 한쪽부터 꼼꼼히 해보자고 한다. 먼저 연하게 면을 채운다. 한 방향으로 선 그리기 연습할 때처럼 천천히 힘주지 말고 손목 쓰지 말고 팔을 움직이라고 한다. 그리고 포도알 하나하나가 동그란 원이므로 명암을 잘 잡아야 한단다.
큰 그림이나 작은 그림이나 과정은 똑같다. 어른 옷이나 아이 옷이나 만드는 과정은 똑같은 것처럼, 오히려 작은 옷이 더 만들기 힘든 것처럼, 포도알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더 힘든 건 포도송이에 달린 포도알마다 빛의 반사가 달라 명암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알알이 위치가 다른 포도알은 여기저기서 윤기를 뽐내고 있었다. 동전만 한 포도알이 커다란 우주처럼 느껴졌다.
수채화로 그린 그림을 보고 그리다가 아리송하면 흑백으로 뽑은 사진을 비교해 가며 명암을 넣었다. 포도송이 사이 어두운 면은 아주 진하게 연필로 칠했다.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선생님은 추석 연휴 끝나고 만나자며 엄청난 숙제를 내주었다. 긴긴 연휴 동안 포도송이 명암 다 넣고, 다음 수업은 볼펜 화를 그릴 것이니 연습장에 볼펜 굴리기를 해보라 신다. 그리고 또 예쁜 풍경 그림을 2장 보여주시며 이 중 하나로 볼펜 화를 그려서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색칠을 해볼 것이니 밑그림을 그려 오라고 하신다.
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일주일, 아니 열흘간의 추석 연휴는 고스란히 미술 그리기로 채워도 모자랄 시간임을 예고했다. 이제 누가 새벽 6시부터 1시간을 차지할 것인지, 새벽 달리기와 그림을 놓고 서로 경쟁해야 한다. 결국 하루는 달리기 하고 그다음 날은 그림을 그리는 알찬 새벽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연휴가 시작되니 이런저런 일들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연휴가 길어서 진도가 많이 나갈 줄 알았는데 시간은 휘리릭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일 수업이 있는데 오늘 새벽에 부랴부랴 밀린 숙제를 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깝다고 하지 마오. 붙잡아도 오지 않는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