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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Nov 20. 2021

생일날 알 수 있는 것들

음력 생일이든 양력 생일이든, 해피 버스데이 투 미

내가 제일 좋아하는 11월이다. 사계절 중에 가을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도 있고 너무 더워서 무슨 옷을 덜 입을지 고민하는 대신 이 옷 저 옷 원하는 대로 레이어드 해서 입는 재미도 있다. (이젠 대한민국에서도 사계절의 뚜렷함을 몸소 체험하기 어려워져서 가을 옷을 사는 게 낭비스럽지만 그래도 가을 옷이 제일 예쁘다.) 무엇보다도 내가 11월을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11월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간단한 TMI를 공유하자면 나는 아직도 음력 생일을 챙긴다. 나름 MZ 세대로 (?) 분류될 이십 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안 문화에 영향을 받은 탓에 매년 음력 생일을 계산해서 달력에 표시해둔다. 그래서 어렸을 때 외국에서 국제학교에 재학할 때는 "음력 생일 (lunar birthday)"라는 개념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일이 매우 어렵고 귀찮기도 했다. 애초에 음력이라는 개념 자체를 생소해하기도 했고 그나마 설날 또는 구정, 외국에서는 흔히 lunar new year 또는 Chinese new year로 일컬어지는 음력 달력의 개념을 예를 들며 친구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귀찮아져서 정말 친한 친구들한테만 내 사정을 (?) 이야기했고, 나머지 동급생들에게는 그냥 페이스북에 알림이 뜨는 양력 생일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이런 불편함은 귀국 후에도 계속됐다. 한창 페이스북이 유행이던 시절 분명 생일 알람이 뜨지 않는데 몇몇 친구들이 생일 축하 메시지를 내 벽에 (wall) 남기고 가니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알람은 안 떠도 생일인가 보다 싶어서 축하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교내 시설에서 마주친 선후배 친구들은 "오늘 생일이었어? 생일 축하해!"라며 친절한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문제는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에서 굳이 알려주는 양력 생일날에 나타났다. 내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분명 이 친구의 생일 알람이 1-2주 전에 떠서 직접 축하 메시지도 남기고 심지어 기프티콘까지 발송해줬는데 왜 이제야 생일 알람이 뜨지? 싶었던 것이다. 부지런한 친구들은 따로 연락해서 그 이유를 물었고, 다소 무감각한 친구들은 2주 만에 또 한 번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가끔 채팅 창을 스크롤 업 해서 의아함을 공유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일일이 상황 설명을 해야 했고 가끔씩 초록색 검색창에서 음력 생일을 계산하는 방법까지 친구들에게 시연해 보여야 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21세기까지 음력 생일을 챙기며 불편하고 머쓱한 경험이 한 둘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왜 양력 생일을 챙기는 쪽으로 바꾸지 않았냐는 질문이 생길 것 같은데... 사실 일 년에 하루 정도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문화에(?) 신기해하는 친구들과 한 번 더 잡담을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다음에 얼굴 볼 약속을 잡기도 해서 반갑게 유지되는 인연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어색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아이스 브레이커 (ice-breaker) 대화 주제로도 활용했는데 어렵고 의아해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음력 생일을 챙기는 2021년의 이십 대가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나 주변 사람에게나 모두 신선하게 느껴진 듯했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2020년부터는) 카카오톡에 "음력 생일로 표시하기"라는 기능이 생겨서 매년 꼬박꼬박 내가 직접 챙기는 음력 생일에 알람을 띄어주고 어플 내에서 축하 메시지도 보내줘서 굉장히 편리하고 고맙다고 느껴졌다. 역시 한국인의 니즈를 파악하는 데는 한국 기업이 최고다 싶었다.


사실 나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굳이 남들이 하는 대로 하지 않고 다소 튈 수 있는 선택은 잘하지 않는 편이라 양력 생일을 택했을 수도 있다. 고집은 세지만 단체 생활을 하면서 내 의견을 완강하게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고 아쉬운 집단적 선택이었다면 슬며시 빠지거나 혼자만의 시간에 아쉬움을 달래는 편이 나에게는 더 편안하고 만족감도 높다. 그렇다면 이런 내가 왜 굳이 일일이 설명하고 매년 달력을 새로 받을 때마다 직접 계산해야 하는 음력 생일을 챙겨가냐고? 가족 문화적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음력 생일이 주는 특별함, 아니 독점적인 (exclusive) 면을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카카오에서 너무 열일해주는 바람에 쉽게 본인의 생일을 노출시킬 수 있게 됐지만.)


나는 SNS 알람 없이도 친구들에게 오는 연락이 좋았다. 정말 욕심쟁이의 마인드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그만큼 신경 써준다는 게 결국 나에 대한 애정 도라고 느껴졌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SNS를 끊임없이 스크롤하다가 발견하는 "XX님의 생일입니다" 대신 매년 연초에 "그래서 올해는 언제가 네 생일이냐"라고 물어봐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지는 척 미리 계산해둔 생일을 알려주기도 했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그날 다른 약속은 잡지 말라며 나름 귀여운 협박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시간을 비워 항상 케이크와 술자리를 함께해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양보단 질로 승부하는 우정을 도모하는 편인 나는 그렇게 매년 주변의 가까운 친구들과 생일을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왔다. 고등학교 땐 친한 친구들 네다섯 명이 모여서 맛있는 밥과 케이크를 함께 먹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매년 동기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짠 하며(?) 즐겁게 생일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생일 당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구체적인 답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불편하게도(?) 월요일이었던 올해 생일엔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도 애매했다. 당장 주변에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친구들은 전부 다 대학원생이 되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모든 학회와 보고서 제출, 세미나 발표가 겹쳐 당일엔 시간 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미리 받고 말았다. 그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닌지라 나 역시 더 이상 떼를 쓰기 어려웠고 말이다. 게다가 월요일이라 가족을 부르기도 어려웠다. 모두 다 각자의 본진에서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단지 내 생일이라는 이유로 월요일에 함께 놀자고 제안하기도 어려웠다. (이젠 나이도 먹을 만큼은 먹었는데 말이야.) 극심한 계획형 인간인 나는 생일 당일 계획의 부재로 인해 다소 우울한 전 주를 보내게 되었는데 다행히 생일 전 주말에 시간을 내준 가족 덕분에, 그리고 생일 다음 주에 곧바로 시간을 내준 친구들 덕분에 나중에라고 행복과 감사를 실컷 느낄 수 있는 뭉클한 생일을 보낼 수 있었다.


생일 전 주말 언니가 먼저 대전에 놀러 와서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실컷 먹었다. 일찍부터 브런치로 시작해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쇼핑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저녁에는 아껴뒀던 샤르도네가 와인과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동네 공원으로 산책도 갔다. 다음 날엔 미역국과 잡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란 장조림과 생선 전을 잔뜩 만들어다 주신 부모님 덕분에 또 한 번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나라는 사람 한 명을 위해 세 명이 먼 길을 수고해준 사실도 고맙고, 덕분에 생일 당일에도 따뜻한 밥을 미역국에 말아 든든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언니랑 간 대전의 브런치 집 <다온> 수플레 팬케이크가 궁금했지만 판매 종료된 메뉴라고 알려주셔서 아쉬웠다. 달콤한 브런치 메뉴에 하루 종일 기분 좋았던 날
대전에 신세계 백화점이 새로 생겨서 놀러가봤다. 매종 마르지엘라 향수도 실컷 구경하고 꼭대기 층에 있는 대전 홍보관에서 할로윈데이 기념 열일하고 있는 꿈돌이를 포착.
돌아와서 파스타랑 부라타 치즈, 그리고 아껴두었던 화이트 와인을 꺼냈다.
다음날 주말 아침 부모님께서 생일 상을 한가득 들고 찾아와주셨다. 소고기 미역국이 최애 국인데 잡채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미역국 얼른 소화시키고 단백질 (그리고 지방) 보충하러 간 외식 장소 <맛찬들> 돼지고기 구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져서 신선하고 맛있었다.

그리고 당일에는 연구실 친구들의 축하도 있었다! 대학원생이 되고 본인이 얼마나 단체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쉽게 활짝 열지 못하는지 깨닫는 과정이 연구 외적으로도 또 하나의 큰 고역이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허물어줄 친구들, 선후배들이 있어서 감사했다. 나의 무뚝뚝함과 번개 약속에 취약한 성향에도 끝까지 함께 "랩 목질"을 도모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친구들이 있어 고마웠고, 덕분에 같은 주 수요일부터 있던 제주도 학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항상 좋을 수는 없겠지만 주변 동료들로부터 좋은 모습만 포착하려고 노력하고 함께 있을 때 즐겁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프로페셔널한 우정을 도모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는 내가 앞으로도 더 노력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구실 친구들이 학교 근처에 있는 맛있는 빵집에서 공수해준 생일 케이크
같은 주에 학회 참석을 위해 제주도에 다녀왔다. 사진이 정말 많은데 너무 많아 정리가 어렵다. 유익한(?) 학회, 무엇보다 재밌는 랩목질의 시간이었다!

제주도 학회가 끝나고 마지막 날에는 혼자 드라이브를 즐기며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작년에 면허를 따고 어렵게 1년이 지나 드디어 차를 빌릴 수 있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렌터카를 빌려 제주도 해안가를 따라 운전하고, 중간중간 들리고 싶은 해수욕장이나 카페, 수제버거 맛집, 그리고 국밥집까지. 나 혼자 소소하지만 취향에 꼭 맞아 소중한 제주도의 곳곳을 하나하나 정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문득 내가 정말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스스로를 돌보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 시간을 채워나갈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제주를 떠나 돌아오는 날 아침 혼자 카페타임을 가지며 일기를 다섯 장이나 쓰기도 했는데 그때 느끼고 기록했던 소중한 마음이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인생 처음으로 빌려본 렌트카! 최소 렌트 시간이 24시간인 점은 아쉬웠으나 안전하게 잘 타고 반납했으니 다 괜찮다.
전 날 숙취해소를 위해 국밥집에 가서 씩씩하게 혼밥했다.
돌아오는 날 아침 스벅에서의 일기타임. 난 지독한 아침형 인간인데 그만큼 일찍 문여는 카페가 없다는 점은 불편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스벅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
3년 전 가족이랑 왔었던 무거버거도 다시 다녀오고, 공항 근처 힙한 편집샵으로 유명한 디앤디파트먼트 제주점에도 다녀왔다.
내가 벌써 스물 일곱이라니, 믿을 수 없어.

마지막 피날레로는 제주에서 돌아와 짐을 풀고 피곤한 몸을 눕히려고 하던 찰나 집 앞에 쌓여있는 택배 박스를 보고 또 한 번 감동받았다. 생일날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었던 친구들이 고맙게도 내 취향에 꼭 맞는 다양한 선물을 보내주었는데 귀여움부터 실용성, 그리고 고유함까지 모두 준비해준 친구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또 한 번 감동받는 순간이랄까. 이렇게 적고 나니 너무 자랑 글 같은데 자랑 맞다. 우리 가족이, 그리고 내 친구들이 정말 최고라고 생각하고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제주 학회 일정 후 나를 반겨줬던 친구들의 마음 (그리고 선물). 어쩌다보니 춘식이 네 마리를 (사진은 세 마리지만) 분양 받았다!

생일이 설레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모두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따뜻하게 전해오는 마음에 귀 기울이며 "그래도 그동안 잘 살았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멋지고 훌륭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나의 인간관계가 더 넓게 확장될 확률보다는 그 반대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에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남아있는 소중한 인연들을 더 세심하게 돌보고 더욱 농축된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나를 응원해주고 예뻐해 주고 진심을 전해주던 사람들 덕분에 꾸역꾸역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생일 중에는 받은 메시지 중 "존재 만으로도 빛 나는 너니까 항상 힘내길 바란다"는 문구가 있었다. 기브 앤 테이크가 기본 값이요, 매번 무언가 해내야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다소 의아하지만 그럼에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믿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어차피 힘든 인생, 태어난 날이 뭐가 중요해?라는 비관적인 마음가짐 대신 내 존재 만으로도 내가 빛 날 수 있다는 축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생일이 나는 너무 좋다. 음력이든, 앙력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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