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뉴욕에서 부모님 모시기

부모님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뉴욕 도심 속 관광 열 바퀴

by 성급한뭉클쟁이

지난주 뉴욕에 부모님께서 다녀가셨다. 뉴욕으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을, 부모님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이다. 긴 여행이 익숙지 않으셨을 텐데도 뉴욕에서 열흘 정도 머물며 도심 속 구석구석을 걸어서 답사하셨는데 문득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체력을 뽐내셔서 놀라기도 했고, 부모님께도 잊지 못할 여행의 추억을 선물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드는 여정이었다.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다시 일상으로 (즉 연구실로) 복귀하였는데 다음날 부모님께서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노트북을 열었다. 일기 같은 또는 편지 같은 글이 될지는 끝까지 써봐야 알 것 같지만 지난 열흘 간의 추억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뉴욕에서 부모님과 함께한 관광 코스에 대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어딜 갔고, 무얼 먹었고, 어떤 "수베니어 (souvenir, 기념품)"를 샀는지에 대한 나열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부모님과 함께 한 일정동안 내가 느꼈던 벅참과 감사함에 대해 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 번째로 나 역시 일상생활 속 뉴욕을 벗어나 여행자로서 이 도시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평소 같으면 (예산 문제로) 지나쳤을 수많은 관광코스를 부모님을 핑계로 (아니 "덕분에"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함께 누린 것이다. 첫 번째 예로는 가장 가보고 싶었던 전망대인 Summit이다. 뉴욕의 기차역인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Grand Central Station) 옆에 세워진 원 밴더빌트 (One Vanderbilt) 마천루의 꼭대기에 문을 연 SUMMIT 전망대는 2021년 10월에 문을 연 뉴욕에서 가장 새것의 전망대이다. 이전 글에도 소개한 대로 나는 2018년 Empire State Building, 2022년 Top of the Rock (Rockefeller), 2025년 초에는 The Edge (Hudson Yard) 전망대에 다녀왔는데 딱 하나 남겨둔 곳이 바로 SUMMIT이었다. 전망대 내부 자체가 거울로 구성되어 있어 어딜 보든 뉴욕 도심이 보이고, 코앞에 Empire State Building과 저 멀리 One World Trade Center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인, 무엇보다 뉴욕의 미드타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인 곳이었다. 또한 구글맵 리뷰 사진을 참고하다 보니 희한하게 생긴 은색 풍선이 날아다니는 방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꾸며놓았을지 궁금했다.


운 좋게 이번 기회를 통해 부모님을 모시고 (무려 일몰 프리미엄 가격을 지불하고!) 다녀오게 되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우선 하루 전날부터 "Get Ready: Your upcoming visit to SUMMIT One Vanderbilt"이라는 제목의 리마인더 메일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SUMMIT에서의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관광 코스를 설명해 주는 가이드라인이었다. 첫 번째는 거울 가득한 "Transcendence (초월), " 두 번째는 "Reflect (반사), " 이어서 "Affinity (친밀) (이곳이 바로 은색 풍선이 날아다니는 방이다.)" "Transcendence II, " "Levitation (공중 부양), " "Unity (통일)"이 있고 마지막으로 제일 꼭대기 층의 칵테일 바와 기념품 샵을 구경하는 순서였다. 10월 중순부터 워낙 해가 짧아진 탓에 오후 3시 반부터 티켓 값에 일몰 프리미엄이 붙었는데 우리는 부모님의 체력과 그전에 구경하고 싶은 동네와의 이동거리를 고려해서 오후 4시 티켓을 구매했다. (하지만 모든 일정에 서둘러 일찌감치 도착하는 편을 선호하는 우리 가족은) 오후 3시 45분에 SUMMIT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도착했고 천천히 짐 검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91층에 내리자마자 엄청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방문 전날 "초월"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좀 오버지 않나 싶었는데 사방이 거울로 이루어진 전망대 공간을 보니 현실 감각을 잃게 되는, 실제로 무언가를 "초월"한다는 느낌을 받아 이름값을 잘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SUMMIT 전망대 방문일 하루 전에 도착한 관광 가이드라인. 온갖 단어들로 공감들을 상상하기엔 어려움이 있어서 막상 올라가면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반사의 공간과 은색 공이 날아다니는 친밀의 공간, 그 후 초월의 2층에도 올라가서 실컷 사진을 찍고, 각도별로 보이는 맨해튼의 도심을 92층에서 내려다보며 구경했는데 부모님께도 잊지 못할 경험이 된 것 같다. 쉴 틈 없이 셔터를 누르고 구도를 바꿔가며 전망을 구경하다 보니 금방 해 질 녘이 되었는데 6시 일몰 시간에 맞추어 모든 공간이 어둡게 변하고, 그에 맞추어 도심 속 불빛들이 모두 "블링블링"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 시간에 맞추어 올라간 덕분에 낮과 밤의 모습을 모두 구경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값이 좀 더 나가도 이렇게 구경하는 편이 더 좋겠다는 결론을 짓고 우리 가족은 출출해진 배를 움켜쥐고 서둘러 저녁식사를 위해 SUMMIT에서 내려왔다.

선셋 (Sunset) 프리미엄 티켓 덕분에 뉴욕 전망의 낮과 밤을 모두 즐길 수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야경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한 취향저격 코스였다고 생각한다.
91층에 도착하자마자 펼쳐지는 거울 가득한 "초월의 방" 1층 (왼쪽). 그리고 SNS에서 자주 보였던 은색 풍선 가득한 "친밀의 방"도 인상 깊었다 (오른쪽).
거울에 비치는 뉴욕 도심속 전망이 정말 멋졌다. 오후 6시가 되니 슬슬 어둑해지던 모습을 "초월의 방" 2층에서 담아보았다.

엄마 아빠가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SUMMIT 전망대 구경을 포함해서 정말 많은 일정을 소화했다. 체력적으로 가장 지치는 날임과 동시에 시차적응이 가장 덜 된 날일 것을 예상해서 다소 무리해서 잡은 관광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일주일 내내 다양한 액티비티와 레스토랑을 섭렵하며 뉴욕 곳곳을 구경했는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는 바로 아빠의 능동성과 적극성이었다.


사실 아빠에게 뉴욕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박사 졸업 후 뉴욕에서의 포닥 생활을 위해 이사를 준비하며 생각보다 도움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3월 초 아빠가 동행을 제안해 주셨을 때 감사한 마음을 품고 흔쾌히 수락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해외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빠의 성향 탓에 근심을 품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함께하면 훨씬 든든하겠다는 팩트와 어릴 적 시행착오를(?) 통해 얻게 된 교훈들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지혜롭게 동행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아빠와 함께 14시간 비행을 필요로 하는 뉴욕행을 결정했었다.


당시에는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다행히 무탈한 일정들의 연속이었으나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한 가지는 바로 아빠의 무심함이었다.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무관심함보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과 기대를 120% 충족시켜 준다"라고 알려진 여행의 천국 도시인 뉴욕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저 얼른 은행계좌를 트고, 미국에서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 SSN)를 발급받고, 가구 마련을 위해 무빙 세일 (moving sale)을 전전하는 것이 극 우선시 되었다. 지나치는 타임스퀘어, 센트럴파크는 그저 처리할 일들을 위해 거쳐가는 배경일뿐, 취향이 다르거나 날씨가 안 좋았던 탓도 있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뉴욕 자체에 감흥이 전혀 없어 보이셨다. 좀 더 관광스러운 활동을 기획해보려고 해도 아빠는 그저 "다음에 엄마랑 다시 오면 보자"는 말만 반복하셨다.

3월 중순 아빠랑 JFK 공항에 도착해서 대여한 개당 만 원짜리 카트 (왼쪽). Uber XXL을 불러서 미리 계약해 둔 집으로 이동했다 (오른쪽). 보기만 해도 허리가 아파온다.
당시 일정은 SSN 신청 및 행정일들과 짬내서 간신히(?) 둘러보았던 9/11 메모리얼 박물관과 주식 대박 기원을 위해 방문한 월가의 Charging Bull (돌진하는 황소상)
"뉴욕에 볼 거 하나도 없다"라고 무심한 듯 이야기하셨지만 3월 이후 지금까지 아빠의 카카오톡 배경화면이 되어준 DUMBO의 풍경 사진. 직접 촬영하고 흑백 사진으로 편집하셨다.

아빠의 그런 말들이 그저 아쉬워하는 딸내미를 달래기 위한 기약 없는 약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가을 여행 동안에는 놀랍게도 그 말이 진심이 담긴 공약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여행 기간 내내 아빠는 능동적이셨고, 적극적이셨다. 엄마와 함께 한 곳이라도 더 구경하고, 뉴요커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블링블링" 뉴욕 야경을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노력하셨다. 뭐든지 신나게 구경하는 엄마의 모습과 그녀가 부재할 때는 그저 무심하게 뉴욕의 거리를 거닐던 아빠의 모습이 다소 이질적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부부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그리고 다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워낙 성향이 정반대 셔서 서로 함께 할 때만 완성되는 상호 보완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 적은 많은데 이번에 유독 강하게 느낀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나는 어떤 사람과 가장 나답게, 또한 내가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하면서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번 여행 중에는 특히 브로드웨이쇼를 관람할 때가 그랬다. 아무래도 비싼 티켓 가격 때문에 관람을 망설이던 부모님을 위해 나는 엄마 생신을 기념해서 (유일한) 효도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나 역시 예산 문제로 좋은 좌석에서 브로드웨이쇼를 즐긴 경험은 없었는데 구실 좋게 오케스트라와 가까운 1층 좌석 표를 구해서 부모님과 함께 "라이언킹"을 관람하기로 한 것이다. 직접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비싼 티켓 값 때문인지 아빠는 그다지 내켜하지 않으셨지만 엄마가 좋아하자 아빠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신나자, 아빠도 신났고, 엄마가 기념품을 고르기 시작하자, 아빠 역시 기념 삼아 라이온킹 굿즈를 고르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엄마 아빠 모두 너무너무 좋아하셨고 (정말이지 극이 시작될 때 흘러나오는 "Circle of Life"는 도입부를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을 형상화한 배우들이 퍼레이드를 이어갔는데 정말 엄청난 볼거리였다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엄마 아빠의 반응을 살펴보았는데 두 분 모두 황홀한 무대 장식과 브로드웨이 배우들의 가창력, 그리고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의 웅장함을 경험하며 재밌게 관람하시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또 한 번 다짐했다. 일부러라도 "필요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의 대화 중에는 직역보다는 의역이 중요하다고. 좀 더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딸내미가 되어 더 많은 구경을 위해 도움을 드려야겠다고 말이다.

엄마 생일 + 부모님 뉴욕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작은 효도 선물로서 라이언킹 뮤지컬 티켓을 구매했다. 나도 좋은 자리는 처음이었는데 브로드웨이쇼는 좌석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커튼콜 (Curtain Call)에 촬영한 라이언킹 브로드웨이 쇼 배우들의 모습.
깊은 감명을 받은 우리 가족은 기념품 샵에서만 거의 $100을 쓴 것 같다. 에코백은 엄마, 머그잔은 아빠, 담요도 원래 아빠를 위해 구매했는데 굳이 뉴욕 집에 두고 가신 부모님.

아빠의 적극성 외에도 놀라웠던 점은 두 분의 탐험력이다. 연구실 일정과 휴가 일수를 고려했을 때 부모님이 뉴욕에 와계시는 동안 주중에는 저녁 외에 시간을 더 빼지는 못했는데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할 만큼 두 분 이서도 뉴욕을 실컷 구경하셨다. 초반에는 어려워하셨지만 연습을 통해 구글맵 사용법을 익히셨고, 뉴욕 지리에 빠르게 적응하신 덕분에 Uptown과 Downtown 방향을 기반으로 해서 가보고 싶은 곳을 탐험하며 누구보다 실컷 뉴욕을 구경하셨다.


퇴근 후 엄마 아빠만의 뉴욕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느꼈던 또 한 가지는 바로 부모님께서 공원을 참 좋아하신다는 점이다. 10월 말 슬슬 노랗고 빨간 빛깔로 물들여진 센트럴파크는 물론이고 집 근처 리버사이드 공원 (Riverside Park) 역시 부모님의 "최애"로 등극했다. 미국은 워낙 나무도 오래되었고 자연적 요소의 규모가 큰 편이라 멀리 서는 간단해 보이는 조깅트랙도 부모님께는 멋진 휴식의 공간이자 도심 속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또한 허드슨야드 (Hudson Yard)에서 시작되는 하이라인 (High Line)을 통과해 첼시 마켓 (Chelsea Market)까지 다녀오셨는데 서울로 7017의 도보코스와 워낙 비교가 되어 안타까웠지만 그만큼 하이라인이 정말 좋았다고 하셨다. 유기적으로 흩어져있는 식물과 한 층 더 높은 레벨에서 바라보는 뉴욕의 도심, 그리고 아래로 걷는 오른쪽 방향에 펼쳐지는 허드슨 강의 모습까지. 게다가 일몰 시간에 방문한 리틀 아일랜드 (Little Island)에는 유독 감동을 받으셨는데 부모님께 훌륭한 산책 코스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같은 날 엄마 아빠의 사랑스러운 선물 또한 받을 수 있었는데 "영원한 꽃다발 (everlasting bouquet)"이라는 이름을 가진 페이퍼 마쉐 (paper mache)와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의 머그잔 세트였다.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우리 아빠는 "이런" 선물을 잘하지 않으시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함께해서 인지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딸내미 아파트 장식을 위한 인테리어 공예 소품까지 선물해 주시는 모습을 보며 혼자 놀라고 감동받은 순간이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해바라기, 그리고 작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살다 온 언니를 위해 튤립 꽃다발을 사다주신 부모님. 말 그대로 영원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꽃다발이다.
부모님과 함께 기분 좋게 맥주 한 잔 하면서 수다 삼매경에 빠졌던 월요일 저녁. (이라고 하지만 결국 초저녁인 오후 아홉 시에 잠에 든 우리 가족이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음식이다. 앞서 언급했던 "시행착오" 중 알게 된 것 중 하나인데 부모님과 여행할 때는 가성비 좋고 맛있는 "한식"이 매우 중요하고, 특히 국물 요리가 빠지면 안 된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지난 3월, 아빠와 뉴욕행을 결정하고나서부터 나는 한식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고, 초반에는 직접 요리하기 어려울 것을 대비해서 햇반과 김치, 그리고 동결건조 블록국을 종류별로 지참했다. 엄마에게 부탁해서 몇 가지나물 반찬과 김, 그리고 메추리알 장아찌도 챙겨 왔고, 잊지 않고 컵라면도 준비한 데다 구글맵 검색을 통해 집 근처 쌀국수와 일본 라멘, 그리고 중식당도 미리 알아두었다. 이 모든 노력 덕분에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랑 같이 장시간 비행동안 쌓인 피로를 씻어낼 "해장"을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뜨겁고 얼큰한 요리로 속을 풀어내는 것이 필수는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 분들은 우리와 이야기가 다르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피로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가장 익숙하고 자극적인, 한식과 (어느 정도의) MSG가 필요하신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예로 나랑 두 살 터울인 언니가 뉴욕에 방문했을 때는 국물은커녕 한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할 때는 하루 한 끼는 (또는 그 이상은) 한식, 또는 아시안 음식으로 먹는 게 서로 좋았던 것 같다.


이건 외식 메뉴를 정할 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부모님 뉴욕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여행 기간 중 생일을 맞이하실 엄마를 위해 뉴욕의 3대 스테이크 하우스 중 한 곳인 피터 루거 스테이크를 미리 예약해 뒀었다. 굳이 윌리엄스버그까지 찾아가서 "Steak for 3"를 주문하고 가장 전통적인 크림 스피니치 (Cream Spinach)와 감자튀김을 주문했는데 전반적으로 엄청난 소고기 양에 감탄하고, 버터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포터 하우스 스테이크를 인상 깊게 드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님 입맛에는 버터 맛이 너무 강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고기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엄마는 식사빵으로 배를 채우셨고, 가니쉬 (garnish)까지 버터맛이 가득했던 탓에 아빠도 피터 루거 스테이크 하우스의 수제소스에 의존해서 스테이크를 잡수신 것 같았다.

한 달 전부터 예약해서 다녀온 피터 루거 스테이크 하우스. 생각보다 느끼해하셔서 가니쉬로 크림 스피니치가 아닌 생양파와 토마토 세트를 주문했어야했나 싶었다.

스테이크 외에도 여러 차례 외식 기회가 있었는데 뉴욕에서만 즐길 수 있는 피자나 베이글 또는 쉐이크쉑의 본고장에서 먹는 햄버거나 덤보 뷰가 코 앞에 보이는 브런치가 아닌, 부모님께서 요리 자체를 가장 만족스러워하셨던 곳은 태국 음식 레스토랑이었다. 이전에 중국에 살 때부터 익숙하게 자주 먹어본 똠양꿍이나 한국인 입맛에도 맞는 수제 만두와 치킨 요리 등이 가장 적합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느끼함이 올라올 때쯤 톡 쏘는 향신료 맛으로 균형을 잡아주거나 식사 후 시원한 망고 소르베로 입감심을 해주니 가장 금상첨화가 되었던 외식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주 "여행"이 아닌 우리 집에서 머물며 뉴욕 관광을 이어간 것이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재료를 사다가 한식으로 밥을 먹을 기회도 많았다. 부모님께서 출발 전 한국에서 미리 장을 봐주신 재료와 미국의 가장 큰 온라인 아시안 슈퍼마켓인 Weee! 서비스를 활용해서 구매한 식재료를 활용해서 뜨끈한 국 한 그릇을 곁들인 한식 밥을 매일 아침 먹었는데 덕분에 출근해서도 하루 종일 든든한 일주일이었다. 특히 추석이 얼마 전이었어서 엄마 아빠가 동태전과 새우버섯 전, 야채 만두와 팥시루떡과 같은 메뉴도 챙겨 오셨는데 집에 있던 사골국물과 곁들여 만두도 끓여 먹으니 뉴욕에서 명절을 쇠는 느낌도 들었다. 게다가 엄마랑 나는 생일이 꼭 2주 차이가 나는데 (음력 생일로 계산하면 그렇게 된다. 덕분에 매년 잊지 않고 11월 내내 함께 축하하는 "월간 생일"을 즐길 수 있어서 참 좋다.) 축하 파티를 위해 집 근처 마트에서 소고기를 사다가 미역국과 잡채를 해먹기도 했다. 하루는 엄마 아빠표 김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께서 집에 계시는 동안 김밥 열 줄을 싸주셨는데 퇴근해서 한 번, 다음날 아침으로 두 번, 그리고 점심 도시락으로 챙겨가서 세 번 잘도 먹었다. 한식과 양식의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우리 가족에게 스테이크보다는 함께 차려 먹은 집밥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 서로에게 느낄 수 있는 따뜻한 국물, 아니 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 아빠가 직접 싸주신 어여쁜 내 김밥 도시락의 모습. 연구실 친구들이 예쁘다고 칭찬해 줘서 실컷 자랑했다.
뉴욕에서 뒤늦게 하지만 제대로 즐긴 명절 스타일 한 상과 (왼쪽) 엄마와 나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미역국과 잡채 한 상 (오른쪽).

그렇게 전망대도 가고, 공원도 가고, 도심 곳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누비며 문화생활도 즐기고 마지막 날에는 이스트 리버 (East River) 강가에서 유람선을 타고 자유의 여신상도 구경했다. 나 역시 곧 생일이라 부모님과 함께 SoHo, 5번가 등 쇼핑에 제격인 동네를 돌아다니며 쇼핑도 했다. 갖고 싶던 노트북 파우치와 가방, 그리고 뉴욕의 매서운 추위를 대비하여 패딩도 장만해 주셨는데 겨울 내내 아주 잘 활용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우리 아빠는 마지막 날 밤까지 딸내미 점심 도시락을 위해 남은 김밥 재료를 활용해서 볶음밥 3인분을 만들어주셨고, 냉장고에는 미역국과 잡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육볶음이 계속해서 남아있다. 그리고 꼭 열흘이 지난 11월 첫 번째 월요일 아침, 우버를 불러 다시 JFK 공항으로 향했다. 연말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부모님을 배웅해 드렸고, 나 역시 곧바로 급행 지하철을 타고 연구실로 복귀했다. 문득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열흘 간 부모님께서 뉴욕에 자리해 주신 덕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뉴욕의 모습을, 특히나 가을 뉴욕의 모습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고, 덕분에 나 역시 평소 생각하기 어려운 다양한 (그리고 비싼!) 관광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퇴근하고 나니 다시 고요해진 우리 집이 나를 반겨주었다. 현관 복도에 줄지어 세워둔 공항용 캐리어가 없어졌고, 손님 용 에어매트리스도 다시 잘 정돈해 두었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적적한 차분함을 느끼며 엄마 아빠 표 미역국을 소분해 떡국 떡을 넣고 끓였고, 남은 잡채와 아빠가 손수 김장을 담가주신 깍두기를 꺼내 맛있는 저녁을 차려먹었다.

귀국 전까지 도시락 메뉴를 걱정해주신 아버지 덕분에 남은 한 달 또 든든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부모님 배웅 후 퇴근해서 끓여먹은 미역 떡국과 잡채, 그리고 깍두기 조합.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점심에는 남은 잡채와 제육볶음을 싸와서 먹었고, 오늘 퇴근하면 볶음밥과 함께 미역국을 마저 더 먹으려고 한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거의 연말까지 먹을 수 있는 만큼의 밥과 음식이 남아있는 것 같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제대로,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열흘이었다. 나는 주변사람으로부터 예민하고 기준이 높다는, 때론 칭찬이고 때론 험담일 수도(?) 있는 평가 자주 듣는데 이건 그저 부모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세워둔 높은 사랑의 기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왕복 서른 시간을 날아서 뉴욕에 방문 주신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고, 무엇보다 부모님께서도 내가 느낀 만큼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선물 같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셨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아빠가 귀국 전 뉴욕 JFK 공항에서 엄마에게 선물했다는 I love NY 키링. 여러모로 상징적인 선물이 되었을 것 같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인 뉴욕의 모습을 부모님과 함께 공유하고 그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 자체가 생일 선물이었던 열흘이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