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도 줄 서게 만드는 윌리엄스버그 빵집의 매력
뉴욕에서 지낸 지 7개월이 조금 지나가는 지금, 슬슬 좋아하는 동네와 취향에 맞는 카페가 내 마음속 자리를 잡고 있다. 맨해튼에서는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노호 (NoHo, North of Houston Street) 근처 이스트 빌리지 동네를 좋아하고, 이스트 강 (East River)을 건넌 브루클린에서는 윌리엄스버그, 그중에서도 그린포인트 (Greenpoint) 동네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원인 도미노 파크 (Domino Park), 뉴욕 3대 스테이크 맛집인 피터 루거 (Peter Luger's Steakhous), 그 외에도 다양한 빈티지샵과 편집샵이 그린포인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내가 이 동네를 좋아하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베이커리의 본고장, 바로 "빵지순례"의 명소이기 때문이다.
빵을 먹기 위해 유명한 빵집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가리키는 "빵지순례"는 "빵"과 "성지순례"를 합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이미 국내에서도 특정 지역의 유명한 빵집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대전에서 10년을 공부했던 나로서 성심당 매장을 찾을 때마다 "빵지순례"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주말마다 KTX를 타고 상경할 때마다 튀김소보로 한 박스만 사다 줄 수 있냐는 부탁도 적지 않게 받았었다. 나도 평소에는 먹기 힘들다 보니 대전역 매장의 계산대 줄이 너무 길지 않으면 흔쾌히 사다주기도 했었다.)
빵집 그 자체를 관광 명소로 인식하며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현상은 대부분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빵집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뉴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틱톡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특정 동네 빵집이 "바이럴 (viral)"해지면 포모 증후군 (FOMO, Fear of missing out)을 느낀 뉴요커들이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해당 베이커리 카페로 몰려드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뉴요커는 줄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밈 (meme)이 해외에서 유행할 정도로 남들이 맛 본건 나도 맛본다! 는 뉴요커들의 강한 포부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진정한" 뉴요커는 맛집 웨이팅을 위해 줄 따위 서지 않는다! 는 의견도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자.)
뉴욕 베이커리 탐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 세계 수많은 문화권의 디저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뉴욕은 워낙 다양한 인구와 역사적 배경이 어우러져 활발한 문화 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메가시티 (megacity)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종류의 빵이나 디저트 메뉴를 진품 (authentic) 버전으로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또 한 번 포닥으로서의 생활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뉴욕의 빵지순례는 넉넉지 못한 연구원 월급으로 즐길 수 있는 적당한 사치이기 때문에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취미활동이 되어준다. 물론 다른 도시와 물가를 비교한다거나, 한국의 예쁜 카페에서 판매되는 디저트와 환율을 고려해 값을 비교해 보면 뉴욕에서 사 먹는 크루아상의 값은 상상 이상으로 비싸지만 (빵 하나에 기본 만 원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뉴욕의 유명한 신예 베이커리를 하나씩 시도해 보고 도장을 깨는 재미가 뛰어난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군데가 어쩌다 보니 모두 윌리엄스버그의 그린포인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이번 글을 기획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 소개할 곳은 바로 라디오 베이커리 (Radio Bakery)인데 뉴욕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몰톡 주제로서 "어디 빵집이 제일 맛있어요?"라고 자주 물어보았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됐던 곳이 바로 라디오 베이커리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방문하려고 했는데 워낙 인기 있는 베이커리 카페라 대기 줄이 매우 길고, 시간대별로 판매되는 빵 종류가 달라 "전략적으로 방문해야 한다"는 조언도 함께 들어서 겁에 질리는 바람에 곧바로 오픈런 방문을 계획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에서 개발자로 일하는 친구가 한 번 더 강력하게 추천해 준 덕분에 용기 내어 윌리엄스버그로 빵지순례를 떠나게 되었다.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 게 많다 또는 적다 역시 논란의 요지가 될 수 있는데 나의 경우 고대하는 마음을 품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다 보면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서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이었든 그 매력이 다소 삭감된다고 믿는 입장이다. 하지만 라디오베이커리는 달랐다. 기다림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주문한 모든 메뉴가 정말 맛이 좋았다. 우선 운 좋게 20분 정도만에 빵집으로 입장이 가능하기도 했고, 그 시간마저 친구와 함께 수다 떨며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방문한 시간도 최적이었던 것이 10시 반에 아침 식사 용 페스츄리 빵을 먼저 구매해서 음료와 함께 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11시부터 판매되는 점심 용 샌드위치를 구매하니 구성 좋은 완벽한 나들이 식사가 준비되었다. 먼저 가장 유명하다는 피스타치오 크루아상과 쪽파 크림치즈가 발린 에브리띵 "베이글"이 아닌 "포카치아"를 구매했고, 그 외에도 버터바와 친구가 추천해 준 "Spicy Tofu & Cabbage" 샌드위치를 구매했다.
에브리띵 시즈닝과 쪽파 크림은 매번 베이글과 함께 곁들여 먹곤 했는데 올리브유 향이 가득한 포카치아랑도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점이 신선했다. 친구 역시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맛본 매운 두부와 양배추 샐러드에 쪽파 타히니 소스와 바삭한 칠리 조각을 곁들인 샌드위치 역시 정말 독특하고 맛 좋은 비건 샌드위치였다. 소스 맛에서는 아시안 음식의 풍미를 가득 느낄 수 있었고, 꽤나 자극적인 맛 때문인지 비건 메뉴라는 점이 놀랍게 느껴졌다. 디저트 메뉴로 버터 바까지 맛보고 나니 배가 많이 불러서 남은 포카치아 빵은 귀갓길에 공원에서, 그리고 피스타치오 크루아상은 다음날인 일요일 오전 좋아하는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려서 행복한 디저트 타임을 가졌다.
또한 라디오 베이커리를 방문하고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사워도우 한 덩어리를 사 온 일이다. 사실 미국에서는 "맛"있는 식사 빵을 먹기가 굉장히 어렵다.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방부제 가득한 식빵을 제외하고는 동네 빵집에서 신선하게 구워진 사워도우나 바게트를 구매하기는 비교적 어려운 편인데 (이런 종류의 빵은 한국에 더 맛있는 게 많은 것 같다. 물론 프랑스 파리와 같은 유럽의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문득 오픈런을 강행해야 맛볼 수 있는 뉴욕의 유명 베이커리 카페에서 판매하는 디저트 메뉴가 아닌 식사 빵은 뭐가 다를지 궁금해졌다. 일반 마트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지만 한 덩어리를 통째로 구매했고 (거의 5-600 그램 정도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들고 다니느라 꽤 고생한 기억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빵칼로 곱게 잘라 소분 후 냉동하고, 궁금한 마음에 몇 조각은 곧바로 토스트 해서 올리브유에 푹 찍어 맛을 보았다. 쿰쿰한 맛이 제대로 올라왔고, 심지어 가열하기 전부터 사워도우 특유의 이스트 향이 느껴져서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극호다!) 너무 좋았다. 한동안 한 장 한 장 아껴서 여러 가지 조합으로 사워도우를 먹었는데 지금까지 최고의 조합은 아보카도와 리코타 치즈, 또는 에어룸 토마토와 부라타 치즈라고 결론지었다.
정말 만족스러웠던 라디오 베이커리의 후기에 대해 작성하다 보니 이번 글은 라디오 베이커리만 소개해도 분량이 충분할 것 같다. 하지만 윌리엄스버그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빵 맛집이 자리 잡고 있으니 내가 다녀온 빵집을 몇 군데 더 소개해보려고 한다. 사실 이미 유명세를 탈대로 탄 라디오 베이커리 오픈런을 실패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 주변에 이미 많은 빵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 블록에 위치한 MOKAFE에서는 다양한 크루아상을 맛볼 수 있는데 디저트 메뉴 대신 크루아상 샌드위치 메뉴가 다양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속이 카다이프와 피스타치로 크림으로 가득 버무려진 두바이 초콜릿 크루아상 역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외에도 일반 패스츄리와 사워도우, 브리오쉬 번과 같은 식사빵을 다양하게 판매하는 Bakeri가 있는데 이곳 역시 라테 한 잔을 즐기며 다가오는 주에 먹을 빵을 구매하기 좋은 곳이다.
그 외에는 라디오 베이커리가 위치한 그린포인트로부터는 다소 거리가 있는 퀸스 동네의 코라 (Kora) 빵집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필리핀 음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패스츄리류 디저트를 커피 메뉴와 함께 판매하고 있는 동네 카페인데 메뉴 역시 코코넛, 우베 (자주색 참마) 등 필리핀에서 사용되는 로컬 재료를 활용해서 개발한 메뉴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말차, 시나몬, 바닐라 등 일반적인 디저트 카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맛의 메뉴들도 다양하다.
이 날은 기왕 멀리까지 간 김에 혼자 방문했는데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두 가지 메뉴를 선택했는데 첫 번째는 우베 맛 도넛 (진한 자주색이 바로 그것이다.)와 옥수수맛 크림이 들어있는 코코넛 도넛을 구매했다. 결과는 말 그대로 어메이징 했다. 특히 맨해튼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라 쉽게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흔한 디저트 대신 이국적인 디저트를 시도해보고 싶거나 실제로 우베나 판단 등 동남아시아 풍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Kora 베이커리는 반드시 한 번 들려볼 것을 권하고 싶다. 코라에 다녀오고 필리핀 여행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 빵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게다가 내부에서 제빵 직원들이 계속해서 빵을 양산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정성스레 만든 크림 필링을 아끼지 않고 때려 넣는(?) 모습에 설레기도 했다. 원래는 무언가를 보상하기 위해 먹고 싶던 디저트를 구매해서 하나씩 맛보곤 하는데 코라의 경우 앉은자리에서 도넛 두 종류를 완벽히 클리어해 버렸다. 정말 재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맨해튼 보다는 낮은 월세 덕분인지 유독 브루클린이나 윌리엄스버그에 도전적이고 개성 넘치는 인기 베이커리 카페가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추세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 브루클린에서 성공하고 나면 맨해튼에도 작게나마 분점을 만든다. 이전 글에 소개했던 L'Appartement 4F 역시 브루클린에서 시작했지만 부자 동네인 웨스트 빌리지에까지 진출하여 수많은 뉴요커들을 또 한 번 줄 세우는 장본인이 되었다. 최근에 봤던 뉴욕의 액티비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Bakery Run (베이커리 런)인데 뉴욕의 유명한 인기 베이커리를 마일스톤 (milestone) 삼아 하프 마라톤을, 즉 21.0975km를 뛰는 코스이자 마라톤 대회가 최근에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심지어 참여하는 "핫"한 베이커리 모두 러너들을 위한 "달달한 연료"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참가 빵집 목록을 보니 정말 유명세를 타는 곳들이었다. (그 리스트는 바로 La Cabra, Radio Bakery, Librae Bakery, L'Appartement 4F, Elbow Bread, Gem Home, Raf's 그리고 La Bicyclette다. 필자의 경우 세 군데를 다녀왔는데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도장을 깨야겠다는 포부를 다지고 싶다.) 백 명의 러너를 초대하려던 이번 하프 마라톤 행사는 예상치 못한 인기 탓에 5천 명이 넘는 신청자가 몰려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하며 곤욕을 치렀다고 하는데 당첨된 사람들은 마치 복권 상금을 받은 듯 기뻐 보였고 실제로 성황리에 행사가 마무리되었다는 기사를 9월 말쯤 접한 것 같다. 나는 뛰어난 러너는 아니지만 부지런한 시티 워커이니 또 열심히 빵집 투어를 계획해 보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위해서 밀가루 폭식은 지양해야겠지만 뉴욕에서는 그러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특히 아직은 대중화되지 않은 숨은 고수 느낌의 베이커리 카페가 윌리엄스버그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덕분에 동네를 더 자세하게 탐방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좋다. 다음 글에서는 윌리엄스버그의 빵집 외에도 내가 경험한 다양한 볼 것과 놀 것, 그리고 맛볼 것에 대해 소개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