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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Jan 29. 2021

호구

이 시대의 “호구” 미덕인가 결점인가?

“네 밥그릇은 네가 챙겨야지!”

“너 그러다가 호구 잡힌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내가 베푸는 친절과 호의를 권리로써 남용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지. 이타적인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타인을 돕다보면 나의 과한 친절을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를 권리라고 여기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친절을 베풀고도 기분이 언짢은 사람이든 호의를 당연시 여겨 소중한 인연을 놓치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참으로 유감스러운 상황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후자의 경우 이런 안타까움을 깨닫지 못하고 만다.


호구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앞서 예를 들었듯이 호구를 “잡는다”라고 말하거나 “호구가 걸리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 “호갱”이라는 번외(?) 버전이 사용되기도 한다. 사전적 의미에 잘 나타나 있듯이 호구는 부당하게 이용당하거나 심한 경우엔 착취당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은, 즉 “호구”인 당사자는 본인이 “호구 잡혔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고 주변 지인으로부터 답답하다는 말을 들으며 “호구”로 형용되곤 한다.


하지만 “호구”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이토록 흔하게 사용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호의를 갖고 타인을 도와주는 일만으로도 “호구” 소리를 듣는 일이 다반사이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남들이 더 먼저 걱정해준다, 너 호구 잡힌 거 아니냐고. 그리고 괜찮다가도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렇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나... 정말 호구인 걸까?


필자 역시 자주 고민하는 부분이다. 본인이 너무 착해서 자주 호구 잡힌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대인배인고 어디부터가 이용당하기 쉬운 호구인 건지 말이다. 그 경계선은 참으로 모호하고 주관적이기까지 한데 실제로 본인에게 알맞은 정도의 기준을 세우는 일 역시 쉽지 않다. 호구의 반대 개념으로 “대인배”를 선택했지만 이는 사실 완벽한 반의어는 아니다. 무조건 대인배가 되어야 하거나 대인배가 되어야만 미덕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 역시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신경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많은 경우 돈이 필요할 때도 많은데 무조건 타인을 위해 나의 소중한 자원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들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까지 친절을 베풀어도 되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직장 동료? 직장 상사? 하지만 “인맥 편식”이 계속되다 보면 그만큼 편협한 자아를 갖게 되진 않을지도 염려되고, 직장 동료 중 얄미운 사람이 있다면 그/그녀가 나 덕분에 잘 되는 꼴은 정말 보기 싫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만약 직장 상사에게만 친절한 경우 타인에게 받게 되는 부정적인 평가도 두렵지만 본인 역시 “내가 이렇게 기회주의적인 아첨꾼이었던가”하고 크게 회의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우리 삶에 대한 많은 질문의 답이 그러하듯 친절을 베푸는 정도와 대상, 그리고 기준 역시 개인이 가장 자연스러운 대로, 편안한대로 행동에 옮기는 일이 가장 지혜로운 것 같다 - 라는 재미없는 결론이 나버리지만.. 사실이다. 솔직히 내가 타인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해 해코지하려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서 역시 수많은 기준과 나의 가치관을 수립하여 이에 맞게 행동해야 하다니.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열심히 도와주고도 호구라고 욕먹거나 이용당했다는 찝찝함을 느낄 바엔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심화됨에 따라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해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개인적인 요소보다도 구조적 요소로 인해 일어나고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이런 개인주의화 역시 사회의 구조적 원인이 크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같이의 가치”를 찬양할 겨를이 없다. 어느 학교든 회사든 기관이든 “팀 플레이어 (Team player)”임을 중요시한다고 주장하지만 ‘팀플’만 열심히 하다가 내 ‘밥그릇’을 챙기지 못한 경우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본인의 밥그릇도 잘 챙기면서 타인과 협업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나의 모든 능력을 수치화된 성적표로 증명해야 하는 ‘능력주의 (Meritocracy)’사회에서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것이 경쟁화되어버린 체계에서 남을 돕기 위해 멈춰가는 것, 또는 잠시 속도를 늦추는 일은 환영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게 ‘친절’은 베풀기보다는 아껴서 비축해야 하는 것이 되었고 “호구”라는 딱지가 붙어 쉽게 이용당하느니 본인 ‘크레디트 (credit)’, 즉 내 노력에 대한 인정은 알차게 챙겨가는 “똑쟁이”가 여러모로 더 나은 편이 되었다.


다만 이런 현실이 다소 안타깝게 느껴진다. 인간은 가장 사회적인 동물로서 서로가 없이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데 말이다. 특히 이미 인생의 황금기에 접어든 많은 대가들은 조언한다,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라고. 항상 친절을 베풀고 당장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없다고 느껴져도 상냥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말이다.


나 역시도 이런 조언을 행동화 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느껴진다. 필자는 (거의)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취향이 정말 확고한 편인데 이는 또 다르게 표현하면 호불호가 굉장히 강하다는 뜻이고, 표정과 언행으로 거짓말이 어려운 필자는 좋을 때 좋은 티가 나는 것보다 훨씬 더 싫을 때 싫은 티가 난다. 즉, “내 사람”이라는 범주 안 사람들에게는 퍼주기를 좋아하고 그 밖 사람들에게는 “호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나 역시도 결국 중간점, 즉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지혜로울 수 있는 그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해쳐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기에,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는 없어도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호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언젠간 이 시대의 “호구”들이 쌓아둔 덕목의 진가가 발휘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필자 역시 오늘보다 내일 더 따뜻하고 넓은 아량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한 소망을 담아 백예린의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의 가사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눈을 맞춰야 해

가끔은 너무 익숙해져 버린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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