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차례 북한 방문해 60명 취재... 일본인 이토 다카시의 전시회
▲ 이토 다카시가 사진에 담은 곽금녀 할머니. ⓒ 이토다카시
그저 돈을 벌러 가는 줄 알았다. 일하던 공장에서 식품 공장으로 이동하라는 말을 들었고, 그대로 열차에 올라탔다. 중국 목단강을 건너 도착한 곳은 소련 국경 인근 군 위안소. 방에 들어온 장교가 호랑이보다 무서웠다고 했다. 일본 군인에게 반항하던 이들이 차례로 죽어 나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도망쳤다. 곡절 끝에 조선인 의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1924년 1월 충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곽금녀 할머니는 이후 북한에 정착, 2007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인 포토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북한' 할머니 곽금녀씨를 총 6번 만났다고 했다. 1924년에 태어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평양에서 차로 2시간 걸리는 함경남도 단천으로 향했다. 이토 다카시가 만난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4명 중 피해 당시 기억을 가장 선명하게 전해줬던 이가 바로 곽금녀 할머니였다.
곽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지만, 생명의 은인의 권유로 북한에서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렀다. 이토는 2003년 곽씨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향했다. 곽 할머니는 병실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통일되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조국의 노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결국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2007년 6월 사망, 단천시에 묻혔다.
지난 1991년부터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듣고 영혼을 위로해줬던 일본인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 10년 뒤 할머니의 무덤을 찾았다는 이토는 그의 책에서 "곽씨의 영혼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위로한 바 있다.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본전시장에서 열리는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주최 :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는 지금, 여기 한국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전시임이 분명했다.
일본군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준 일본인 저널리스트
"근대 일본은 인류가 과거의 교훈을 통해 진보해 왔다는 보편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다.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일은 과거에 일본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 다짐한다.
과거와 마주하지 않는 일본 정부, 그리고 이를 용인하는 일본 사회가 향하고 있는 것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피해자의 경험을 기록해서 후세에 남겨야 한다."
이토 다카시가 유독 '피해자'의 목소리에 매달린 이유였다. 이를 위해 이토는 1980년대부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 중엔 한국인 피해자들도 여럿이었다. 그렇게 여러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을 만나던 차에,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을 접했다.
한국인 저널리스트들이 취재하기 힘든 북한인 피해자들을 '일본인'인 자신이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그때였다고 한다(김학순 할머니가 첫 증언을 했던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 지난해 첫 기념일 행사를 가졌다). 결국 1990년대에 줄곧 이토는 북한과 일본을 수십 차례 왕래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4명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일본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60여 명을 피해자를 만났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인 안해룡 감독과 만난 것은 사진집 <기억하겠습니다>가 계기가 됐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김학순 할머니를 포함, 이토가 취재한 20명의 남북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담은 사진 기록집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다룬 다큐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와 <다이빙벨> 등을 연출하고 사진 작업을 병행해왔던 안해룡 감독이 이 사진집을 눈여겨봤고, 안 감독은 3년 후인 2017년 번역자인 이은씨와 공동으로 작업, 한국어판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안해룡 감독은 현재 이토씨가 1990년대부터 기록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분노>(가제)를 제작 중이다.
현재 일본에 있는 재일 한국인의 역사와 조선인이 관계한 일본 현지의 전쟁 유적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 중인 안해룡 감독. 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진으로 담게 된 것은 2002년 여성부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비디오 증언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침묵의 외침'으로부터 시작됐다. 안 감독은 이 '침묵의 외침'에서 "김복동 외 9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각자의 '감성과 회한'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7일 열린 전시 오프닝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사진이 전해주는 감성 역시 이 '회한'으로 갈무리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할머니들의 얼굴이 전하는 감정은 단순히 '분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몇 마디 말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다단한 정서를 전해준다. 다음은 지난 7일 전시 오프닝에서 이토 다카시와 안해룡 감독이 나눈 문답을 정리한 내용이다(편의 상 안 감독의 질문은 요점만 간단히 정리했다).
▲ 좌로부터 안해룡 감독과 이토 다카시 저널리스트. ⓒ 하성태
운명적 계기가 된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 일본인이 북한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취재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텐데.
"아무래도 일본인 남성이다 보니, 나 자신이 일본인이고 남성이라는 입장에서 피해자들을 마주하고 말씀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때로는 피해자 분들께서 저에게 분노를 강하게 표출해 (인터뷰하기에) 어려움도 있었다. 물건을 던지는 분도, 달려들겠다는 듯이 분노하는 표현하는 분도 있었다. 아무리 괴로워도 내 스스로 마주면서 피해자들의 분노를 다 껴안고 가야지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전에 원폭 피해자나 일본군 군속으로 끌려갔던 사람들, 강제 동원 피해자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 한국은 피해자 단체가 있지만, 북한은 그런 환경이 아니었을 텐데. 취재 준비부터 그 과정은 어땠나.
"북한 당국에 먼저 피해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을 하면 소개를 받는 식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신청을 해도, 막상 평양에 가기까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취재를 했다. 만났던 분은 60명 정도 됐고, 그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14명이었다."
- 방문 자체도 어렵지만, 원하는 만큼 여유로운 취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래도 취재 상 큰 제약이 있는 나라이다 보니 취재 과정에서 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취재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하신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바꿔서 말하면, 자기 체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의 아슬아슬하게 마지막인 단계에 인터뷰를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건강상 장시간 이야기 듣는 것도 물리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가능한 만큼 이야기를 듣고, 필요하면 바로 중단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했다. 여의치 않으면 일본으로 일단 돌아갔다가 되도록 빨리 재방문해서 다시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생존자 중 곽금녀 할머니가 계신데, 이 분만큼은 옛날 일을 아주 상세히 기억해서 여섯 번 정도 만나서 취재를 했다. 이 분도 그리 오래되지 않아 돌아가셨는데, 이후 다른 기회를 빌려 함경남도에 가서 성묘도 했다. 그렇게 여러 제약들 속에서 취재를 했다고 보면 된다."
▲ 이토 다카시 저널리스트의 카메라에 담긴 북한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중에서. ⓒ 하성태
- 처음엔 사진과 음성 녹음을 통해 기록하다가 비디오 카메라에 증언을 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또 그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었나.
"1980년대 초반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들과 한국인 피해자를 만나 취재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음성 녹음 외에 단순 보완용으로 메모만한다거나 했는데, 이후 장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싶어서 더 의식적으로 녹음을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1991년 10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개 증언 한 김학순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공개증언이 8월이었으니,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때 꽤 주의를 기울여서 녹음했는데, 육성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테이프 속에 남아 있어서 최근에 다시 듣고 꽤 감동했다. 그렇게 음성 녹음을 하던 차에 고성능 비디오카메라가 출시된 1995년 이후엔 비디오로도 기록하게 됐다. 더 꼼꼼하게 기록하게 된 계기는 어느 출판사 편집자의 응원이었다.
그가 '이토, 당신이 취재한 내용이 장차 굉장한 보배가 될 것'이라고 그러더라. 잡지나 책은 발표하면 일단 마무리 같은데, 영상은 조금 다르다. 보물이란 얘기를 들으니 더 그런 것 같더라. 당시는 반신반의했지만, 그 이후 더 꼼꼼하게 기록한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피해자 분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서 기록 하나하나가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발휘하는 때가 온 것 아닌가 싶다."
- 이토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엄청 놀랐다. 회의 자료를 미리 꼼꼼하게 정리한 것도 그랬지만, 자료 영상들을 밀폐시켜서 절대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더라. 살고 계신 지역의 대지가 강보다 낮으니 범람할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또 몇 분 몇 초 중요 리스트를 정리해 놓은 메모도 수백 개고. 언제부터 그렇게 이상한 정리를 시작하게 된 건가(웃음).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집에 필름이 계속 쌓여갔다. 바로 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 소중한 기록이 쓰레기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취재 끝나면 바로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특히 평양 취재는 더 그랬다.
평양에서는 취재 일과를 마치면 녹초가 됐다. 취재 교섭부터 인터뷰 진행은 물론 비디오로 기록하고 그걸 또 스틸로 남기는 것 모두를 혼자 해야 했다. 또 북측은 관행상 (관계자들과) 다 같이 움직이고 통역한 분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늦게까지 술자리도 해야 했다. 늦게 거리가 먼 숙소로 돌아오면 정말 녹초가 됐는데, 그때 자료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 일기도 포함됐다고 하던데.
"원래 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닌데, 북한에서는 매일매일 일기를 써서 이야기를 자세하게 남겼다. 지금도 계속 (취재)일기를 쓰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기록을 남기길 잘한 것 같다. 4월에 일본을 대표하는 '리버럴'한 출판사에서 내 단행본이 출간된다. 북한 취재기를 담은 두꺼운 책인데, 그 바탕이 바로 북한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남긴 일기들이다.
그때 일기에 꼼꼼하게 내용을 담은 것이 책 한 권 분량이 됐고 이제 가치를 발휘하는 것 같다. 최근 일본에서 북한 서적이나 자료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오고 있는데, 그래도 오랜 세월 꼼꼼하게 남긴 기억들이 올바른 형태를 지닌 채 꽃을 피우는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 이토 다카시 저널리스트의 카메라에 담긴 북한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중에서. ⓒ 하성태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과오를 취재한 이유
- 아시아 각국을 취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주로 어떤 내용을 담았나.
"지금껏 23권의 책을 냈는데, 대부분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았다. 출판사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 피해자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괜찮겠냐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저는 명확하게 증언이 다르기 때문에 포함해서 담는 게 좋겠다고 봤다.
그래서 두 종류의 피해자 여성들의 증언을 같이 담았다. 그러한 시도가 제일 처음인데, 당시만 해도 일본 내에서 양자를 혼동했다. 그래서 더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원제가 '깨어진 침묵'인데, 한국 제목은 '종군위안부'로 번역본이 나와 있다. 한반도 뿐 아니라 타이완, 필리핀 등 다른 아시아 지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아까 북한에서 일제 강점기 피해자 분들 60명을 만났다고 말씀 드렸는데, 아시아 지역 여러 나라와 파퓨아뉴기니까지 포함해서 한 800분을 만난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고민스러운 게, 가령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사진전도 개최하고, 안해룡 감독이 곧 영화로도 완성할 예정이지만, 책이나 여타 매체로 채 다 담지 못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다."
- (관객) 북한 당국도 자체 조사를 벌였다고 하던데.
"북한에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문제를 대응하는 주체적인 기구가 있었다.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대책위원회', 약칭 '조대위'라고 하는 곳이었고, 그곳이 대응 창구였다. 피해 당사자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면서 최근엔 그리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가 파악하기론 북측에서도 이 '조대위'가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증언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보존돼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번에 취재한 내용을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는데, 북측에 확인해 봤더니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을 남기긴 했는데 비디오 테이프로 쌓아두기만 한 걸로 파악됐다.
북에서 일본을 향해 과거 청산을 요구항목으로 곧잘 꺼내놓기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기록 보존 작업을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다."
▲ 이토 다카시 저널리스트의 카메라에 담긴 북한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중에서. ⓒ 이토다카시
- (관객)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과오를 취재했다.
"일본에서는 8.15가 되면 전쟁 피해자들이 자주 거론되는데, 도쿄 공습 피해자들, 원폭 피해자, 일본인 피해자 이야기만 나온다. 15년 전, 20년 전에는 아시아의 피해자들, 한반도의 피해자들도 노출이 됐는데, 지금은 전부 일본인 뿐들이다. 저는 일본이라는 가해 국가에서 피해 기록을 남기고, 일본 사회에 발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제가 피해자들을 만나고 오랫동안 취재한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일본 정부는 국민이 과거 역사 잊게 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과거 역사를 외면하려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다. 취재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과거 아시아에 대해 일본이 어떤 일을 했었는가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다음 세대 후세에게 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일본이란 나라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이 때로는 일본인 입장에서는 외면하고 잊고 싶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정확히 무슨 일을 했나 정확히 포착하고 기록하고, 그때와 같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일본 입장에서 부정적인 기록이라도 꼭 남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저는 소박하게나마 그것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 (관객) 북한에 집중한 이유도 궁금하다.
"한국의 피해자들은 한국인 저널리스트가 많이 취재하고 언론에서도 소개 많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일본 식민지 통치 하에서 똑같은 입장인 북한 피해자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걸 취재하다보니 알게 됐고, 그래서 북한 당국에 1991년 처음으로 취재 신청을 하게 된 거다.
그때는 오래 취재하게 될 거라 생각을 안 했다. 처음엔 한 번 가서 이 사람 저 사람 여러분의 많이 이야기를 듣고 정리할 생각으로 (체류를) 3개월 신청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이후 단독으로 다시 북으로 취재 간 건 1998년이다. 그때는 3주일 정도였다.
제가 시작하면 누가 뒤를 이어서 다른 사람이 이어가겠지만 했는데, 하다 보니 그런 사람이 안 나오더라. 단기간, 짧게 취재해서 발표하는 사람이 있긴 해도. 그러다 보니,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이어서 취재를 했고, 결국 북한을 방문하는 횟수도 늘어서 지금까지 40번 정도 방문하게 됐다."
- (관객) 이런 작업을 하면서 일본 정부의 배상이나 사과도 염두에 뒀을 것 같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어떤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일본에서 한국과의 외교 관계나 역사 문제에 있어 껄끄러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일본 사회의 역사의식 후퇴인 것 같다. 일본 내에선 한반도 관련 동향이나 여러 사안에 대해 늘 주목하는데, 일본사회의 분위기가 크게 변화한 건 아베 정부 탄생 이후다. 아베 정권은 민족 배타적인 정권이고, 성립 태생부터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이용했다.
이후에도 북한을 고강도로 비난하고, 북한 때리기를 통해 정권을 지켜왔다. 그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는 단순히 북한과 관련된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을 판결해서 논란이 됐는데, 일본은 5~6년 전에 다 끝난 문제를 한국에서 다시 거론한다는 분위기다.
1965년 한일 협정 자체가 불평등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재검토할 문제가 많은 조약이었다. 일본이 보유한 잔류 문화재 문제 하나만 해도 그렇다. 원래 한반도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니 반환하는 게 맞는데 그러지 않았다.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포함해 한국이나 아시아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 이토 다카시 저널리스트의 카메라에 담긴 북한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중에서. ⓒ 이토다카시
▲ 이토 다카시 저널리스트의 카메라에 담긴 북한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 전시중에서. ⓒ 이토다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