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사건' 이후 10년, '피의자' 승리가 증명한 것들
▲ '빅뱅' 승리 광역수사대 자진출석인기그룹 '빅뱅'의 승리(본명 이승현)가 27일 오후 자신이 사내이사였던 강남 클럽 '버닝썬', 마약, 해외 투자자 성접대 등 각종 의혹 관련 수사를 받기 위해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자진출석하고 있다.ⓒ 권우성
"우리가 거짓말은 하지 말자. 손님들을 보니까 진실을 좋아하시더라고요."
지난해 SBS <미운우리새끼>에 출연한 빅뱅 승리는 "사업을 하다 보면 가장 조심해야 할 게 위기대처능력이야"라던 이상민의 조언에 자신이 맞았던 위기와 극복기를 나름 진솔하게 털어놨다. 그가 운영 중인 라멘 사업의 주요 수입품인 일본간장을 배에 실어오던 와중에 태풍을 만났고, 2주간 곤경에 처했다는 설명 중에 위와 같이 자신만의 대처법을 고백한 것이다.
방송은 그를 '위대한 승츠비'라 치켜세웠다. 친동생까지 동반 출연한 MBC <나 혼자 산다>에서도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계속됐다. 방송, 그것도 리얼버라이어티 예능의 속성이 그러한데 어떡하랴. 'CEO 승츠비', 그러니까 '위대한 개츠비'에 자신을 빗댄 별명이다. 이것이 지난해 11월 '버닝썬' 사건이 일파만파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 전 승리가 추구하던 이미지였다(승리의 회사 유리홀딩스는 승리의 별명 '승츠비'를 상표 출원까지 등록해놨다는 후문).
승리의 말이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단, 그가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는 건 부정할 순 없을 듯하다. 출연하는 방송마다 사업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부각했던 것을 보면.
피의자 승리의 입건
"지난달 26일, 한 인터넷 연예 매체가 공개한 가수 승리의 모바일 메신저 대화입니다. 승리가 지인들에게 해외투자자들을 위한 성 접대 자리를 만들라고 지시한 정황이 담겼습니다. 지시한 시점은 지난 2015년 12월 6일, 강남 클럽인 아레나의 3번과 4번 테이블을 잡으라고 구체적인 장소까지 적었습니다. 이 사건을 내사하며 해당 대화의 원본 일부를 확보한 경찰은 승리를 피의자 신분으로 정식 입건하고, '클럽 아레나'를 압수 수색했습니다."
10일 자 MBC <뉴스데스크> 보도 중 일부다. 승리는 이날 성매매 알선 혐의의 피의자로 입건됐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뒀던 지난달 27일 밤 승리는 경찰에 자진 출두, 사건의 진앙인 강남경찰서가 아닌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성접대 의혹과 관련된 조사를 받은 바 있다. 당시 승리는 이례적이라 할 만한 '셀프 탄원서'를 거론하며 이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저는 오늘 오전에 저에 대한 엄중한 수사를 촉구 드리는 탄원서를 경찰에 제출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하루 빨리 이 모든 의혹들이 규명될 수 있도록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승리가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지난 11일. 승리가 다른 남성 가수들과 불법 촬영물을 공유했고, 그 가수들 역시 소환돼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 가수들이 누군가 하는 궁금증과 함께 여론이 지속적으로 들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실로 씁쓸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빅뱅 팬클럽마저 퇴출을 요구한 승리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위대한 승츠비'의 몰락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석 달 넘게 MBC가 추적 보도한 '버닝썬 사건'의 핵심 인물인 승리가 급기야 다른 혐의도 아닌 성매매 알선 혐의로 입건된 상황이 개탄스러워서다.
사업가 승리가 열의를 갖고 운영에 참여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클럽 사업(버닝썬 외에 승리가 홍대의 클럽을 운영했고, 탈세가 이뤄진 그 홍대 클럽의 실소유주가 YG 엔터테인먼트와 양현석 대표라는 의혹도 불거진 상태다-기자 주)이 마약을 포함한 성 접대까지 연루됐다는 게 팩트로 밝혀진다면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 '빅뱅' 승리 광역수사대 자진출석인기그룹 '빅뱅'의 승리(본명 이승현)가 27일 오후 자신이 사내이사였던 강남 클럽 '버닝썬', 마약, 해외 투자자 성접대 등 각종 의혹 관련 수사를 받기 위해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자진출석하고 있다.ⓒ 권우성
클럽 버닝썬이란 무대
많게는 1억, 적어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비용을 치르는 이들이 VVIP였다고 한다. 강남 클럽 특성상 그들은 대부분 20~30대 젊은 층이었고, 심지어 클럽에 출입이 금지된 10대 고객까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MBC의 최초 보도 이후 쏟아진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 투자자도 있었고,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고위층 자제도 수두룩했다는 전언이다.
그러니까, 승리 입건과 클럽 아레나의 압수수색은 이러한 클럽 운영의 주요 업무에 성 접대가 포함됐다는 정황을 가리킨다. 10일 경찰은 승리와 모바일 대화 창에 등장한 이들을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복수의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성 접대 의혹과 관련된 카톡 대화 내용에 일관성이 있다고 보고 카톡 대화 원본을 확보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서 클럽 버닝썬 임직원은 강남경찰서 전직 및 현직 경찰들에 줄을 댔고, 이른바 물뽕이라 불리는 마약을 손님들에게 제공했으며, 이를 통해 투자자와 고객을 유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과정에서 클럽 버닝썬이란 유명 강남 클럽에서는 성매매 알선이 이뤄지고, 불법 촬영물 촬영과 공유가 이뤄졌으며, 성추행을 비롯해 더 심한 성폭력까지 자행됐으리라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니, 유추가 아닌 지금까지 경찰 조사와 여러 보도를 통해 제보자들이 증언한 내용이 그러하다.
이 과정에서 생긴 피해자들은 모두 여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초 제보자로 알려진 김모씨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폭행 피해 의혹이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올라오면서 급격히 이 사안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모든 논란과 잡음을 뒤로하고서라도 남는 분명한 사실은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장소가 버닝썬이었고, 승리는 그 사건과 관련이 깊은 주요 인사였다는 것.
10년 전 그 사건에 대한 기시감
여기서 한 여성 연예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난 7일 10주기를 맞은 고 장자연씨 말이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그를 두고 근절되지 못한 성 접대 문화의 피해자, 양심을 버린 권력자들의 추악한 단면이라는 등 여러 해석이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 일견 클럽 버닝썬 사건과도 꽤 유사한 지점이 있어 보인다.
10년 전 당시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보수 일간지 사주를 비롯해 기업인, 방송인 등 유력인사 수십 명이 여성 연예인에게 성추행을 일삼으며 접대를 받았다. 이를 강요한 사람은 해당 연예인의 소속사 대표 등이었다. 더욱이 고 장자연씨와 최근 목소리를 낸 고인의 동료 윤지오씨를 접대 자리로 몰아넣은 이유는 소속사가 절박해서라기보다는 관계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알려졌다.
▲KBS 2TV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써니 역으로 출연했던 탤런트 故 장자연씨의 발인이 9일 오전 성남시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된 가운데 고인의 영정이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2009.3.9ⓒ 연합뉴스
장자연 사건은 우선 한국사회 권력층과 연예계가 연결된 추악한 접대 문화의 단면이다. 폭력과 강요, 협박 등에 노출돼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린 여성 연예인의 인권 문제 또한 짚어야 한다. 제대로 수사되지 못한 채 현재까지도 과거사 청산 명목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결국 수사기관과 권력층의 유착관계까지도 파고들어야 할 사안이다.
권력형 접대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버닝썬 사건 역시 추악한 접대 문화와 수사기관의 유착관계가 의심된다는 점에서 장자연 사건과 유사하다. 나름 정의해보자면 버닝썬 사건은 10년간 근절되지 못한 남성 중심의 성 접대 문화가 천민자본주의를 업고 고도로 진화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주체만 권력자가 아닌 돈 많은 젊은 남성 혹은 사업가 등으로 바뀐 셈이다.
10년 전 한국사회는 권력자와 수사당국의 합작으로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묻어 버렸다. 소수만이 자행할 수 있던 범죄를 근절하지 못한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버닝썬 사건은 아닐까. 남성 권력층-여성 연예인의 구도가 재력가-일반 여성으로까지 확대됐으니 말이다. 그 무시무시한 문화를 받아들인 이들의 연령대도 무섭도록 어려지기까지 했다.
버닝썬 사건의 진실은 밝혀질까. 장자연 사건은 검경의 축소와 은폐로 진상규명에 실패했다면 지금은 좀 사정이 달라 보인다. 제보자들이 있고,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으며, 국민의 공분을 머금은 정부의 강력 대응 의지도 보인다.
"경찰의 유착 의혹에 대해 경찰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수사해 의법 처리하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못한다면 어떤 사태가 닥쳐올지 비상하게 각오하고 수사에 임하기 바랍니다."
지난 5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낙연 총리는 모두 발언을 통해 이렇게 지시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승리가 입건됐다. 승리와 YG엔터테인먼트가 오는 25일 현역 군입대를 발표하자, 11일 민갑룡 경찰청장은 승리의 입대 후에도 국방부와 협의, 수사를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버닝썬 사건 최초 보도 이후에도 의혹을 부인하며 승리의 해외 단독 콘서트까지 강행했던 YG엔터테인먼트가 이젠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도 주목해야 한다. 장자연 사건으로 실추된 수사당국 역시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일부 연예인의 일탈로 이 사건을 바라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