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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Feb 23. 2021

'며느라기' 속 아버지 세대의 변명




'시월드' 격공일기라던 <며느라기> 마지막 장면. 맞다. 드라마 전체를 챙겨보진 못하고, 설 연휴 공개된 마지막 2화를 정색하고 봤는데,  무언가 타협한 거 같은 결말이나 판타지에 가까운 남편의 소 '서윗'한 대응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됐다, 는 건 사족이고. 


그런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명절엔 시댁과 친정에 나눠 가겠다는 아들 내외의 선언에, 발끈한 아버지가 어김없이 대포집에 가서 소주를 기울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친구도 불러서, 맞아 맞아 우리 애들도 그래, 라며 대공감을 시전해 주시고. 이 드라마의 결말도 결국 좋은 게 좋은 건가, 싶기도 하고. 


그 아버지는 이렇게 하소연을 늘어 놓는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우리 때는 다 그러지 않았냐"고.  설 연휴 때 잠시 시달려서 그런지, 그 장면에 버튼이 눌렸다! 그러니까 이런 울분. 


아이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자기 아이들의 마음조차 이해 못하면서 행여 어떤 누구의 마음을 이해하겠느냐고.


그건 '아버지 세대가 다 그렇지'라고 두둔하거나 '못 배워서 그런 거니 이해해 드려야지'라고 퉁치고 봐 줄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 


왜 그러냐고. 그 아버지 세대는 결국 자식 세대에 대한 몰이해를 자양분 삼아 자기위안을 위한 일종의 보호막을 쳐왔던 건 아닐까. 생존을, 일상을 핑계 삼아 '좋은 게 좋은 거지'라거나 '에이, 나는 그런 거 못해'라는 보호막. 걸 깨지 못하면 결국 화해나 공감은 저 멀리 유니콘이 되어 버리는 일만 남았을 것이고.  아니면 그 보호막을 감추고자 온갖 물리적, 상징적 유산을 들이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론, 그 '며느라기' 세대는 훗날 또 얼마나 달라지고 진화할 수 있을까. 그게 쉬웠다면 지구의 흔한 부모 자신 간의 갈등은 진즉에 해결되지 않았을까. 결국 형태와 양상만을 달리 할 뿐,  그 갈등의 골은 영원히 반복되는 게 아닐까. 우리 시대의 '민사린들'은, '무구영들'은 정말 자신 있을까. 30년 후 자기 부모, 시부모의 약점들을 닮지 않을 자신이.  


물론, 이 <82년생 김지영>의 하위 버전이 세상의 '민사린들'에게 보내는 응원이야말로 우선돼야 할 공감 포인트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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