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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Sep 03. 2022

<순이삼촌>과 제주4.3과 나


스무살이던 1998년 3월 말이었습니다. 동기 녀석과 술 마실 건수 없나 과실을 어슬렁 거리는데, 5학년 1학기를 즐기고 있던 91학번 선배 둘이 우리를 불러세우거든요. "야, 새내기 니들, 종로로 술 마시러 안 갈래?". 뭘 망설였겠습니까. 좋아라 따라 나섰지요. 어라라. 근데 하늘 같은 27살 선배들이 데려간 곳은 일단 술집이 아니라 미술관이었습니다. 네, 인사동 학고재 갤러리였지요. 1998년은 제주4.3 50주년이었고, 마침 4·3 50주년 기념 강요배 화백 <동백꽃 지다> 순회전이 열리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역시나 93학번 선배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건네준 <순이삼촌>을 읽었던 터라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물론, 그날 91학번 선배들과 필름이 끊기게 술을 마셔서 그 기억이 약간 옅어지긴 했지만요.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8년 제주4.3 70주년 제주4.3을 전국에 알리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네 맞아요. 그 스무살 기억이 영향을 미쳤지요. 이후 까맣게 잊고 살다 <지슬>의 선댄스 진출 소식을 두 번째로 전한 영화기자였을 뿐이었지만요. 요즘들어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란 클리쉐 같은 말을 자주하는데요. 제주가 부산에 이어 가장 친근한 지역이 된 것도, 제주 출신 선후배들을 이렇게 많이 만나게 될 줄은 2018년 전엔 절대 예상 못했던 일이었죠. 그러고 보니 신문에, 광고에, 단편영화에, 영상 콘텐츠 기획에, 1시간 짜리 교육용 시나리오에, 국가 추념식 작가 및 기획에, 4.3과 친구들 영화제까지. 4.3을 홍보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오기도 했네요


오늘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왔습니다. 강혜명 소프라노 총연출을 한 그 <순이삼촌> 원작의 오페라를 관람하고 나왔는데요. 이제 현기영 선생님은 몇 번 인사드리고 제 얼굴을 아시고는 매번 "젊은이! 4.3을 어서 대중영화로 만들라"고 "<화려한 휴가>나 <택시 운전사>처럼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라"고 하신답니다. 그에 앞서 <순이삼촌> 오페라가 먼저 도착했네요. 스무살 3월 소설을 읽고 24년 만에 창작오페라로 만나는 <순이삼촌>, 3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가장 힘들 건 역시나 북촌리 학살 장면이네요. 커튼콜에서 현기영 선생님 등장하실 땐 뭉클했네요. 초고 쓰고 접어둔 4.3 시나리오를 다시 만져야겠다는 다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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