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 <킵 스텝핑>
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 <편집자말>
[하성태 기자]
영화제 개막식 무대에 스트리트 댄서들과 댄스 크루들이 올랐다. 이색적인 풍경이 맞다. 신나고 경쾌한 라이브 음악과 랩은 이들이 벌이는 '댄스 배틀'만을 위한 전용곡이다. 리듬이, 흥이 살아난다. 케이블 음악방송 채널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이사 스우파)에 이어 <스트리트 맨 파이터>(이하 스맨파)에 친숙한 이라면 환호할 만한 광경이다.
이중 호주에서 온 유일한 여성 댄서 패트리샤가 마이크를 잡았다. 개막작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향해 기립을 요청했다. 스트리트 댄스의 기본 동작을 알려주던 패트리샤가 마지막에 힘줘 강조한 제스처는 '하트'.
개막작 <킵 스텝핑>('Keep Stepping')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패트리샤가 전하는 열정과 활력이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식장인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 고스란히 전염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패트리샤와 또 다른 주인공 조 원(Jo One, 윤조현)은 브레이킹 심포닉 밴드, 소울번즈 댄스 크루, 오리엔탈 히어로즈 댄스 크루와 함께 인상적인 공연을 펼쳤다(22일 개막).
제69회 시드니영화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다큐멘터리상과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수상한 개막작 <킵 스텝핑>은 이처럼 호주에서 활동하는 여성 스트리트 댄서 둘과 힙합-댄스 신의 긍정적인 기운을 카메라에 담아낸 흔치 않은 다큐다.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상영되는 <킵 스텝핑>을 개막식에서 먼저 봤다. '스우파'에 열광했던 청춘들이, 여성들이, 이를 넘어서는 중장년 관객들 모두 만족스러워할, 향후 국내 극장 개봉이 예감되는 엔터테인먼트와 완성도, 문제의식을 겸비한 다큐였다.
'스우파'에 열광한 당신이라면
▲ 다큐멘터리 <킵 스텝핑> 스틸 이미지. ⓒ 루크 코니시
이 영화를 접할 관객은 둘 중 하나일 공산이 커 보인다. '스우파'를 봤거나 안 봤거나. '스우파'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관심을 끌었고, 그 유행에 따라 방송계가 댄서들을 대거 유입시키는 계기가 됐던 바로 그 댄스 경연 예능 프로그램이다. '스우파'의 남성 버전인 '스맨파'도 한창 방영 중이다.
그 스트리트 댄스에 대한 이미지를 잠시 떠올려 보시길. 누군가에게는 젊음과 활력, 저항의 상징이요, 또 누군가는 비주류와 퇴폐, 일탈과 동의어로 다가갈 지 모를 일이다. 같은 말 다른 뜻이라도 해도 상관은 없다. 어쩌면 <킵 스텝핑>의 지향은 스트리트 댄스에 대한 이 모든 선입견을 총합하고 뛰어 넘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을테니.
다큐에서 공간은 인물만큼이나 주요한 핵심 요소다. 카메라가 데려가는 곳은 호주의 거리요, 이 거리의 댄서들이 경합하고 목표하는 주 무대가 호주 최대의 스트리트 댄스 경연라 인정받는 'Destructive Steps'('DS', 파괴하는 스텝)이다.
주인공은 셋이다. 우선 한국계인 조 원은 10년째 호주 힙합신을 선도하는 'DS'를 이끌어온 장본인이다. 호주 스트리트 댄스신을 조망하는 역할을 한국계 호주인이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법 하다.
칠레인 어머니와 뉴질랜드 원주민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가비는 부모의 나라 모두가 춤과 밀접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전통적인 장르인 브레이킹 댄스가 아닌 자유 댄스에 특화된 가비는 대회가 열리는 지역적 특색이나 개인의 서사를 춤에 녹여내는 장기를 자랑한다.
또 다른 여성 브레이크 댄서 패트리샤는 루마니아 태생으로 독일을 거쳐 호주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민자다. 주변 동료 남성 댄서로부터 10대1로 붙어도 기가 죽지 않을 것 처럼 보인다는 소위 '센캐'라 불린다. 스스로도 지고 싶지 않다는 이 승부욕과 열정의 소유자이자 춤 하나만을 위해 대륙을 건너 호주의 거리 댄스신을 만난 것 자체가 어떤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체를 조망할 공간적 배경이 존재하고 영화가 주요하게 따라잡을 인상적인 캐릭터가 존재한다. 커뮤니티 전체의 역사나 긍정성이 부각된다. 'DS' 몇 주 전부터 시간 순대로 이어지는 서사의 중간중간 인물들 인터뷰 사이에 펼쳐지는 긴 분량의 댄스 장면들은 스트리트 댄스의 문외한인 관객들을 홀리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마존 프라임의 6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도맡고 <킵 스텝핑>을 통해 장편 데뷔한 루크 코니시 감독은 여기서 한 발 더 넓고 깊게 들어간다. 비단 여성 둘을 넘어 이민자와 소수 인종, 비주류와 혼혈 등등 마이너리티를 대변할 수 있는 세 인물을 선정한 것 자체로 <킵 스텝핑>의 지향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이 지향하는 행보를 보이는 것 만으로도 스트리트 댄스가 주는 열정과 치유, 긍정의 에너지라는 영화의 주제를 묘하고 진한 울림과 함께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춤 때문이다
▲ 다큐멘터리 <킵 스텝핑> 스틸 이미지. ⓒ 루크 코니시
3살 때 호주로 건너갔다는 조 원은 어릴 시절 혈육이나 전통을 중시하는 강압적인 아버지의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아버지는 심지어 영어 교육을 위해 동양인이 단 3명인 학교로 아들을 전학시켰다. 그 '백인 학교'에서 당연히 따돌림을 받았던 동양인 소년이 접한 것이 힙합 문화와 스트리트 댄스였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부모가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춤의 매력을 통해 인생과 일상의 변화를 경험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패트리샤의 고향 마을에선 도저히 춤 출 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춤을 추기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한다는 가비는 생활을 위해 집안일에 치여 살았다. '춤의 나라' 출신인 부모에게 댄서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함은 물론이었다.
스트리트 댄스 자체가 마이너리티로서의 정체성을 품고 있다면 도전의 스텝을 멈추지 않을 세 사람의 생의 여정 역시 비주류, 소수자, 타자, 약자 등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지닌 독립체이자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후반부로 갈수록 이 영민한 다큐는 의도한 주제와 인물의 환경과 철학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강조해 나간다.
물론, 남성들의 예술이라 인식돼왔던 스트리트 댄스를 가비와 패트리샤가 역동적이고 독창적으로 소화해 낼때의 감동 또한 호주에서 온 이 다큐의 매력 중 하나다.
단순히 남성 커뮤니티가 여성을 품어 내는 서사일 수 없다. 가비와 패트리샤의 오늘과 내일은 자연스레 스트리트 댄스가 추구하는 정신, 즉 춤을 통해 자기자신과의 싸움에 직면하고 타인과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경쟁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커뮤니티를 넘어 세상과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커뮤니티를 이끌어왔던 조 원이 은퇴(?)를 선언하며 흘리는 눈물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DS' 우승 여부는 부차적이다. 대회 이후 패트리샤는 어떻게든 호주에 남기 위한 현실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애쓴다. 가비는 자신의 쇼를 선보이며 그 독창적인 춤의 세계를 확립시켜 나간다.
<킵 스텝핑>의 마지막, 여러 현실적인 고충을 털어놨던 두 여성은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춤 때문이다. 그 감정의 연원을 알게 된 관객들 또한 그 만족감에 전염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 역시 춤 때문이다. 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왜 치유라는 감정과 연결되는지를, 그리하여 생에 대한 의욕을 북돋어 주는지를 <킵 스테핑> 역시 재확인시켜 준다. 이게 다 스트리트 댄스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