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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by 로에필라


비 오는 날,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이 좋다.

비 오는 날에는 카페에 가서 유리창에 앉아서 비 오는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보다 보니 걷고 싶어 졌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단화를 신은 채 길을 걸었다.

물 웅덩이도 첨벙첨벙 걷고, 물에 젖은 나뭇잎도 바라봤다.


삼단우산을 쓰고 걸었는데 베이지색 트렌치코트가 젖어서 갈색이 되었다.



비를 머금은 나무는 더 진한 색을 내고 있었다.

짙푸른 초록.


물이 고인 길을 걷는 게 재미있었다.

어릴 때 장화와 우산을 쓰고 싶어서 비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장마로 비가 차오르면 장화를 신고 마당을 뛰어다니다 우산을 놓치면 우산 없이 비를 맞기도 했었다.


텃밭에서 키웠던 봉숭아꽃이 잘 자라나 보고,

뒷마당에 가서 달팽이가 나오나 쪼그려 앉아서 구경도 했었다.


비가 오면 항상 창문을 열었었다.

집 안으로 비가 들이닥치는 게 좋았다.

창문을 통해 비가 들어올 땐 너무 세지도 않고, 수압이 센 물뿌리개 정도의 약한 느낌이다.

비가 올 때의 시원한 소리와 공기가 좋았다.



비가 오면 교문 앞에 어머니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땐 스마트폰이 없어서 다들 일기예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아주 흐린 날이 아니고서야 그냥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만 달랑 들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힘차게 등교를 했다.


하교할 때 비가 오면, 교문 앞에는 형형색색의 우산을 쓰고 있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씌울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게 참 부러웠었다.


우리 엄마는 한 번도 학교에 우산을 주러 오지 않으셨다.

그래서일까?

비가 오면 오히려 더 뛰어갔다.


친구들이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할 때도 있었지만 사이좋은 모녀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뛰면 비 덜 맞아."


뛰어가면서 조금은 서러웠던 것 같다.


"왜 우리 엄마는 학교에 안 데리러 올까?"


비가 오던 어느 날,

나는 신발주머니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에 올렸다.

조금이나마 머리를 안 젖게 하려고 머리를 가린 뒤 바람처럼 빠르게 뛰어갔다.


뒤에서 누군가가 날 부른 것도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 마당에서 가방을 벗고 숨을 고르며 쉬고 있었다.


-끼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엄마가 우산을 들고 들어오셨다.


우리 엄마가 날 데리러 왔었구나!


비 오는 날 엄마가 날 데리러 온 적은 딱 한 번이고, 데리러 오지 않은 날들이 더 많다. 그래도 서로 엇갈려서 우산을 받지 못했지만 집에서 엄마를 마주쳤을 때 가슴이 따뜻해지며 감동했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비 오는 날, 엄마가 우산을 쓰고 날 데리러 왔다.

그 뒤로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들 중에서 우리 엄마가 있는지 살피게 되었다.



비 오는 날엔 좋은 기억이 많다.

남편과 처음 만난 날에도 비가 내렸었다.


빗소리가 좋다.

아스팔트 아래에 빗물이 깔려서 신호등 불빛이 비친다.

빗물이 튀긴다.

내 발소리가 빗물을 헤치며 달리는 차 소리에 묻힌다.


온 세상이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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