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로 들어서자 길고 검은 머리를 내려뜨린 조금 마른듯한 필리핀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다.
"안녕하세요. 체크인하러 왔어요. 빨래 향기가 너무 좋네요."
건조기에서 갓 꺼낸 세탁물을 접고 있었던 여성은 대답했다.
"고마워요. 아고다로 예약하셨죠?"
"네."
그 여성은 에이포용지 반절정도 되는 종이를 줬다. 그 종이에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대문자로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사인해주세요"
기분 좋게 사인을 하고 나니,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여권으로 신분확인을 한 후, 방을 안내받았다.
커다란 수영장이 보였다.
내가 예약했지만, 이래도 되나?
"너무 좋잖아!!!"
꺄아!!!!!!
소리 질러~!
작고 아담한 숙소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8개의 룸이 있는 단층 건물 앞에는 직사각형의 파란색 수영장이 건물만 하게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었다.
말소리, 기계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적한 곳.
나 자신을 칭찬했다. 보홀에 와서 가장 잘한 건 마지막날 숙소를 잡은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하얀 싱글침대 두 개 위에 예술적으로 접어진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환대받는 느낌이었다. 예쁘게 접힌 수건의 주름에서는 아까 맡았던 섬유유연제 향이 포근하게 나면서 우리 둘을 반겨주고 있었다.
방에 캐리어를 넣고, 벽걸이형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아늑한 방 전체를 돌면서 습기를 말려주었다. 비닐팩에 넣어놨던 덜 마른 수영복을 꺼내서 벽면에 있는 사다리에 걸어놓았다. 공항 가기 전에 조금이나마 더 마를 수 있을 것이다. 장식용으로 보이면서도 실용적인 역할을 톡톡히 하는 나무사다리 소품이 좋았다.
캐리어는 딱 한 개만 열어놓고, 나머지 하나는 열지 않았다. 여유로운 공간은 아니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누워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사람냄새나는 숙소였다. 호텔보다 더 집주인의 취향과 손길이 들어간 에어비앤비 같은 느낌의 숙소이다. 이 방에는 친한 친구가 멀리에서 방문했을 때, 깨끗이 청소하고 깨끗한 침대보를 빨아서 침대를 세팅해 주는 것 이상의 정성이 들어갔다.
커튼을 다 젖히면 바로 수영장이 보였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로는 처마처럼 지붕이 튀어나와 있어서 비와 햇빛을 조금이나마 막아줄 수 있었다. 남편은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선베드에 누워서 수영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이 여유를 한껏 즐겼다. 파란 수영장 위로는 하늘이 보였는데, 그 하늘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날카롭고 긴 이파리로 가려져 있었다. 내 눈이 보는 모습이 사진의 한 장면 같았다.
"너무 좋다."
"너무 여유로워."
"우리 둘밖에 없어."
선베드에 누워서 바라본 하늘
선베드에 누워있는데 닭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수영장 주변을 돌아다녔다. 닭이 돌아다니는 이 풍경도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재미있기만 했다.
'난 선베드에 누워있으니까 닭이 내 위로는 올라오지 않겠지.'라고 생각한 순간 닭이 푸드덕-하면서 날아올라서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닭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어서 닭이 날 수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아 맞다. 닭한테도 날개가 있었어."
양념통닭을 먹을 때, 닭날개도 맛있게 먹었지만 그 날개로 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닭이 활동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날기까지 하다니! 그 순간이 못내 유쾌했다.
"우리 이제 졸리비 먹을래요?"
저녁으로 졸리비를 테이크아웃해서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졸리비로 하려고 한다.
수영을 하던 남편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체크인을 했던 장소로 갔다. 체크인을 할 때 냉장고에 맥주와 탄산음료가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냉장고에 있는 캔음료는 파는 건가요?"
"네. 팔고 있어요."
편의점보다는 조금 더 비싼 가격이었지만, 시원하게 바로 음료수를 사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치킨과 스파게티에는 콜라가 빠질 수 없지!
시원한 코카콜라를 사서 수영장으로 돌아왔다.
수영장에는 라탄으로 된 선베드와 파라솔이 설치된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졸리비에서 사 온 치킨과 스파게티를 세팅하니 제법 그럴듯했다.
"여기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조금씩 어두워져 가니 더 조용해졌다. 산속으로 캠핑에 온 것 같은 고요함이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잠시 방에서 쉬기로 했다. 침대에 벌렁 누워서 핸드폰을 충전하려고 220v 핸드폰 충전기를 끼우려고 했더니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 220v 안 돼요."
와이파이도시락에 돼지코가 있었기 때문에 돼지코를 핸드폰 충전기에 연결해서 끼웠다.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조금 자요."
"이따가 공항 가야 하는데 어떻게 자. 조금만 쉬다가 나가서 수영할래."
"내가 깨워줄게요. 어서 자요."
달칵-
전등을 끄고 남편의 등을 토닥토닥-두드렸다. 남편이 편한 침대에서 잠들기를 바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컨디션이 좋다.
-도로롱도로롱
남편이 잠이 들었다. 괜스레 뿌듯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이 숙소를 예약했다. 남편이 30분이라도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잔다면 그걸로 이 숙소는 충분히 제 몫을 한 것이다.
남편이 잠들자 침대 옆, 협탁에 있는 스탠드의 불을 켰다. 한번 잠들면 깊게 자는 남편은 불을 켠다고 해서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잠들지 않으려고 불을 켰다. 불침번을 서는 군인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안 자려고 벌떡 일어났다. 침대가 보이니 자꾸 눕고 싶어 져서 밖으로 나갔다. 선베드에 누울까 했는데 필리핀 남자 두 명이서 누워서 대화를 하고 있길래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캐리어를 열어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두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툭. 투투투툭. 툭툭툭툭
문을 열어보니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신발이 다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어서 신발을 안으로 들여놨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내리던 빗소리는 문을 닫자 잔잔한 ASMR로 변했다. 가끔 유튜브로 빗소리를 듣곤 했는데 이렇게 들으니 더 좋았다.
공항에 가기로 한 시간이 다가와서 남편을 깨웠다. 세차게 퍼붓던 비는 어느덧 멈춰있었다.
"생수병에 마실 물 좀담아가야겠다."
밤 11시 15분쯤 정수기에 물을 뜨러 방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어슴프레 두 명의 형체가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트라이시클도 보였고, 한 명은 미리 약속했었던 트라이시클 기사였다.
"일찍 오셨네요. 잠시만요. 여기 이 생수병만 채우고 바로 나올게요."
생수병에 물을 담고 있는데 "체크아웃하실 거죠?"라는 물음이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은 아마도 이 숙소의 주인인가 보다.
"네. 열쇠 가지고 올게요. 잘 쉬었어요. 감사합니다."
트라이시클에 캐리어를 넣고 공항으로 떠났다.
필리핀은 전압이 220v이다. 하지만 숙소에 따라서 플러그 모양이 11자 모양이어서 220v가 안될 수도 있으니 어댑터(돼지코) 한 개 정도 챙겨가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