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불자로 살기.
나는 프랑스에서 불교 철학을 공부한다
이 생에서는 가본 적도 없는 히말라야 왕국이 눈물 나게 그리워 우뚝 솟은 영혼의 성산 카일라스를 가슴 깊이 소중히 품고 사는 나는 불교 수행자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눈 덮인 설산 깊은 곳 어느 외딴 동굴 속, 바람 소리 벗 삼아 홀로 정진하는 출가 수행자처럼 조용히 책을 보고 공부를 하거나 경전을 보고 또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며 보낸다.
나는 프랑스에 오기 전부터 불자였다. 산이 좋아 부쩍 산에 다니던 어느 날 우연히 산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에 이끌려 절에 다니게 되었고, 어떠한 일이 나를 흔들어도 법당에 와 앉으면 그제야 진정이 되고 숨이 쉬어졌다.
그렇게 꾸준히 절에 다니다 발심하여 수계를 받고 법명을 받고 수행을 이어가던 중, 알 수 없는 강한 끌림으로 티베트 불교의 수행과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가 아마도 2010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발걸음이 저절로 절로 향했고, 법회에 참석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책을 읽고 법문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 영화일을 하던 나는 일정한 요일과 시간에 맞추어 사찰에서 하는 경전 수업을 꾸준히 듣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도중에 그만두게 되기를 부지기수.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수행에 대한 열망과 갈증은 나날이 더 강해져만 갔다.
그리고 영화 현장에서 늘 설레고 두근거리던 내 가슴이 언제부턴가 더 이상 뛰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과감히 일을 접고 조용히 네팔과 인도행을 계획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인생이라 했던가. 지금은 이렇게 프랑스에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에 온 후 나의 인간관계는 원하던 대로 단출해졌다. 깊이 있는 속내를 아무에게나 쉬이 드러내 보이지 않는 나는, 함께 사는 남편과 고양이 하타에게 말을 건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자발적 고독을 택하고 스스로 묵언 수행을 하는 셈인데 요즘 들어선 이래서 수행자들이 묵언을 하는구나 싶을 만큼 조용히 흘러가는 침묵의 시간이 맑고 더없이 충만하다.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인간관계가 많이 줄었으며 거리가 멀어진 만큼, 결국 거기까지였던 인연들은 알아서 사라져 갔다. 그럴 때면 괜스레 서운도 하고 꽤나 힘들기도 하였으나 인연이 다해 가는 것뿐, 이제는 인간관계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인생은 홀로 가는 길이고 인연이 오고 가는 것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자 인과 법칙인 것이다. 그리하여 멀어져 간 인연은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해외에서 불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외로운 일이다. 기도처도 없고, 곁에 도반도 스승도 없기 때문에 기도도 수행도 공부도, 오로지 혼자만의 근기로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런 상황이야말로 수행을 하기 최적의 상태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좋다가도 가끔은 '게으름' 혹은 '외로움' ‘공허함’ 등의 감정들이 밀려와 나를 솔솔 흔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멀찍이 떨어져 앉아 지켜보려 노력한다. 휩쓸려버리면 홀로 제 자리에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득하게 앉아 무심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그 파도 밑의 고요함이 보이고, 회오리치듯 유영하던 불순물이 하나 둘 깊이 가라앉으며 깊숙한 곳에 성기게 흩어져있던 생각의 잔재들이 살며시 실체를 드러낸다.
결국 내면의 기저에 깔린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나의 집착에서 비롯된 탐욕과 성냄 그리고 무지였다. 그것이 내 생각을 오염시키고 혼란을 야기하고, 또 착각에 빠지게 만들어 본질을 볼 수 없게 방해한다. 결국 무지와 집착은 고통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걸 정확히 인식하고 분별하지 않고 본질을 바로 보려고 노력한다.
분노나 외로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도, 사랑과 행복 등의 긍정적인 감정도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도 모두 일시적 현상일 뿐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어느 것도 고정불변 한 것은 없다.
그러니 지금 행복하다고 마냥 기뻐할 일도, 지금 불행하다고 한 없이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제는 생사가 오가는 중대한 일이 아닌 이상, 오고 가는 인연이나 감정에 큰 의미를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이젠 부정적인 감정들이 찾아와도 조금만 머물다 이내 바람처럼 훌쩍 스쳐가 버린다.
모든 영적인 길에 이르는 통로는 '완전히 포기하는 마음‘이다. 마음은 정확히 무엇을 포기하는 것인가? 우리는 고통, 곧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들을 포기해 나가야 한다. 포기란 즐거움이나 소유물들을 반드시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포기할 것은 우리가 가진 소유물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우리의 무지한, 집착하는 태도인 것이다.
Lama Thubten Zopa Rinpoche.
아직 이곳에는 적을 두고 다닐 사원도, 조언을 구하거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나눌만한 스승과 도반이 내 곁에 없지만 프랑스에 온 이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다. 그래서 이제야 국제기관의 수업도 수강하고 불교 단체에도 가입하여 법회도 듣고 경전 공부나 명상, 기도 수업에도 참여하며 원하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한글로 읽어도 어려운 과정을 프랑스어로 해야 한다는 어려움은 있지만 영어 과정이 아닌 프랑스어 과정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종종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하니 그만큼 습득은 더 힘들고 속도도 더디지만 이왕 시작한 공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렇게 내 갈길을 가려고 한다.
느리게 가는 듯한 이곳의 삶이지만 감사하게도 하루의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밤이 찾아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은 순환한다. 이제야 그 흐름에 온전히 나를 맡기고 주어진 것들에 원 없이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삶이다.
그저 처절하게 생존하기 위해,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수 밖에 없던 지난날들이 마치 전생의 일인 듯 아득하고, 다행히도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들숨 날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감사하게도 내 일이라면 언제나 온 마음으로 응원하며 기꺼이 함께 해주는 든든한 도반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나의 남편이 내 곁에 있고, 오래전부터 삶의 어려운 고비마다 늘 바른 길로 이끌어주시는 선재스님의 가르침이 있기에 힘든 여건이지만 한 발 한 발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오랜 시간 곁에서 묵묵히 응원해 주는 이들과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할 수 있기를, 아직 부족하지만 언젠가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회향할 수 있게 되기를 서원한다.
가끔은 생각해 본다. 그토록 소망했던 티베트도, 공부하러 떠나고 싶었던 인도도 아닌 왜 이곳 프랑스인가?
그 실마리를 찾으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이 머나먼 나라 프랑스에서 책과 경전을 탐독하며 수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설레는 순례의 여정을 천천히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