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now Lion Oct 25. 2023

오로지 바람만 불고 있을 뿐이다

 


2월의 북한산.

해가 지기 시작하자 겨울바람은 더 매섭고
아이젠을 채운 발은 힘 없이 툭툭 자꾸만 미끄러진다.


발을 헛디디면 큰일이다. 힘 없이 허우적거리며 떨리는 다리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어느덧 해는 붉은 잔영을 남기며 서쪽 하늘너머로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드문드문 하산하던 사람들마저 어느새 뚝 끊기니 마음만 자꾸 급해진다. 오늘따라 몸은 또 왜 이리 무거운지 산에 쌓인 눈이 저녁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어 한발 한발 옮기기도 힘이 든다.




오늘처럼 우리가 함께 산에 오를 때면, 넌 매 힘든 구간마다 따뜻한 큰 손을 주저 없이 내게 내밀었다. 괜한 자존심에 나 혼자 할 수 있다며 투정 부리듯 으레 그 손을 거절하던 나였다. 그래도 넌 꿋꿋이 나를 챙겼기며 자꾸자꾸 멈춰 서서 내가 잘 오고 있는지 뒤돌아 확인했고 그럴 때면 나는 빨리 속도를 내라며 채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이다지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올라왔건만 도움 필요 없다 괜한 고집부리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가게 되면 어쩌나 싶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가도 ‘에이... 매번 너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너의 따뜻한 마음을 타박으로 응수했던 지난날들이 괜스레 떠올라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그저 꿀꺽 삼킨다.



어두워지기 전에
무조건 백운대 정상에 올라야만 해.



그러나 야속하게도 기운은 점점 빠져가고 설상가상으로 며칠 전 수술했던 부위마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당장의 겨울 산행은 무리라며 만류하던 의사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도 오늘만은 절대로 그냥 내려갈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내가 이 산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백운대에 오르고야 말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니까.


'힘들면 내려갈까요? 괜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따라주지 않는 몸을 무리하게 이끌고 서두르다 결국 미끄러져 주저앉고 싶던 순간, 행여나 착한 네가 안절부절 미안해할까 마지막 힘을 쏟아 내어 힘껏 일어선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잠식해 오는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지는 빛의 화양연화. 어둠과 빛의 극명한 대비에 눈 덮인 산 봉우리들의 경계가 마치 웅크린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인다. 마치 내가 숨 쉬던 세상이 아닌 듯, 바람과 적막만이 가득한 곳. 그곳에는 오로지 바람만 세차게 불뿐이다.


짙푸른 하늘빛. 어스름이 흩어져 모든 존재가 어둠의 적막 속으로 서서히 몸을 숨기는 시간. 하늘과 산의 경계도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도 무의미해지는 시간. 모든 존재가 허공의 어둠이 되는 시간.


지금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 바람마저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제는 너를 보내야 한다.



우뚝 솟은 백운대 정상에 서서 천천히 너 없는 세상을 둘러본다. 어둠과 빛의 경계가 사라져 간다. 육신의 소멸 후 너의 영혼은 지금쯤 이 경계 너머 어디에 있을까. 죽음과 재생사이에 존재한다는 바르도에 있을까.


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중음의 세계에서 부디 네가 두려워 말고 지혜의 빛을 잘 따라가기를. 삶과 죽음도 너와 나의 형상마저도 모두가 다 깨고 나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환영이라지만 이리도 황홀한 빛이 내 두 눈앞에 가득 시리도록 수놓아진 세상인 것을. 스스로 생을 등지고 싶을 만큼 왜 그리 고단한 삶이었던가.


육신의 옷을 훌훌 벗은 너를 담은 유골함을 차디찬 바위 위에 조심히 내려놓는다. 생전에 그토록 좋아하던 소주 한잔 가득 따라놨는데 지금 어디에 있니. 못내 아쉬워 주저하자 바람이 야속하게도 세차게 길을 재촉한다. 이제 이렇게 보내면 영영 이별일까 꼭 쥐었던 손을 살며시 펴자 마치 기다린 듯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되어 훨훨 날아간다. 잘 가. 허공의 어둠을 힘차게 가르는 산새들 벗 삼아 훨훨. 한치의 미련 없이 자유로운 바람 되어 떠나라.



바람 되어 훨훨.
네가 그리는 만년설이 있는 곳으로.



바람이 된 너를 보내고 못내 남은 미련에 뒤 돌아보고 또 뒤 돌아보며 어둑해진 산길을 내려가는 길. 산 밑 어느 절인가에서 들려오는 저녁 예불 범종 소리가 온 산을 장엄하게 울린다. 지난했던 너의 이번 생이 이제 정말로 끝이 났구나. 그러니 이제 나도 그만 너처럼 바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떠나기 한 두 달 전이었던가. 너는 내게 불쑥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냐고 물었고 난 주저 없이 히말라야라고 대답했다. 내 말이라면 바보같이 무조건 다 믿어주던 그저 착한 너는 고개를 조용히 돌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히말라야...라고 되뇌었다.  그러니 넌 지금은 설산의 바람 되어 내가 있는 이곳으로 다시 세차게 불어오는 중이리라.




어느 밤 작고 평범한 동네에 자리한,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허름한 주점에 모여 앉아 소주잔 기울이며 나눴던 우리의 다짐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눈이 사는 곳, 히말라야를 두 눈에 담기로 했던 우리의 약속을 나는 혼자라도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것을. 어두운 밤, 별처럼 반짝이던 우리의 눈빛과 두근대던 심장의 소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오롯이 보아주고 마음 깊이 사랑하고 염려했으며, 지난했던 삶의 고통마저도 마치 내 것처럼 힘껏 끌어안고 기꺼이 함께 해 주었던 나의 친구. 글을 쓴다면 내 생애 가장 소중한 벗이었던 그의 이야기를 제일 먼저 쓰고 싶었다.


그가 바람 되어 훌쩍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그리고 이 세상에는 여전히 너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