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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 Lion Oct 25. 2023

오로지 바람만 불고 있을 뿐이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



2월의 북한산.
해가 지기 시작하자 겨울바람은 더 매섭게 불고
아이젠을 채운 발은 힘 없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발을 헛디디면 큰일이다. 힘 없이 허우적거리며 떨리는 다리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어느새 해는 붉은 잔영을 남기며 서쪽 하늘 너머로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어둠 속 드문드문 하산하던 사람들마저 뚝 끊기니 마음만 자꾸 더 급해진다. 오늘따라 몸은 또 왜 이리 무거운지 온 산에 덮인 눈까지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어 한발 한발 옮기기도 힘이 든다.



오늘처럼 우리가 함께 산에 오를 때면, 넌 매 힘든 구간마다 따뜻한 큰 손을 주저 없이 내게 내밀었었다. 괜한 자존심에 나 혼자 할 수 있다며 투정 부리듯 으레 그 손을 거절하던 나였다. 내가 잘 오는지 자꾸자꾸 멈춰 뒤돌아 확인하던 너를 괜스레 타박하며 그냥 빨리 속도를 내라며 채근하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렇게 고생을 하며 올라왔는데 괜한 고집부리다 정상에도 못 가고 내려가게 되면 어쩌지 싶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가 '에이... 매번 너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괜스레 지난날들에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꿀꺽 삼킨다.



어두워지기 전에
무조건 백운대 정상에 올라야만 한다.



얼어붙은 산을 잔뜩 긴장한 채 올라서 인지 기운은 점점 빠져가고 설상가상으로 며칠 전 수술한 부위마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당장의 겨울 산행은 무리라며 만류하던 의사 선생님의 당부가 떠오른다. 의욕과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몸은 점점 뒤로 처지고 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만은 절대로 내려갈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내가 이 산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백운대에 올라야만 하니까. 마치 히말라야에 오르는 듯 비장한 표정을 지어본다. '힘들면 내려갈까요? 괜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힘들어 주저앉고 싶던 순간, 이런 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행여나 네가 미안해할까 다시 힘을 내본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눈 덮인 거대한 산 봉우리들이 거대한 한 덩어리로 보인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 적막만이 가득한 정상. 그곳에는 오로지 겨울바람만이 세차게 불뿐이다. 짙푸른 하늘빛. 짙은 어스름이 흩어져 모든 존재가 어둠의 적막 속으로 서서히 몸을 숨기는 시간. 하늘과 산의 경계도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도 무의미해지는 시간. 모든 존재가 허공의 어둠이 되는 시간. 지금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 바람마저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제는 너를 보내야 한다.



우뚝 솟은 백운대 정상에 서서 천천히 너 없는 세상을 둘러본다. 어둠과 빛의 경계가 사라져 간다. 육신의 소멸 후 너의 영혼은 지금쯤 이 경계 너머 어디에 있을까. 죽음과 재생사이에 존재한다는 바르도에 있을까. 홀로 갈 수밖에 없는 그 중음의 세계에서 두려워 말고 지혜의 빛을 따라가기를. 삶과 죽음도 너와 나의 모습조차도 실체가 없는 환영이라지만 이리도 황홀한 빛이 시리도록 가득한 세상인 것을. 스스로 생을 등지고 싶을 만큼 왜 그리 고단한 삶이었던가.


육신의 옷을 훌훌 벗은 너를 담은 유골함을 차디찬 바위 위에 조심히 내려놓는다. 생전에 그토록 좋아하던 소주 한잔 가득 따라놨는데 지금 어디에 있니. 못내 아쉬워 주저하자 바람이 야속하게도 세차게 길을 재촉한다. 이제 이렇게 보내면 영영 이별일까 꼭 쥐었던 손을 살며시 펴자 마치 기다린 듯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되어 훨훨 날아간다. 잘 가. 허공의 어둠을 힘차게 가르는 산새들 벗 삼아 훨훨. 한치의 미련 없이 자유로운 바람 되어 떠나라.



바람 되어 훨훨.
네가 그리는 만년설이 있는 곳으로.



바람이 된 너를 보내고 못내 남은 미련에 뒤 돌아보고 또 뒤 돌아보며 어둑해진 산길을 내려가는 길. 산 밑 어느 절인가에서 들려오는 저녁 예불 범종 소리가 온 산을 장엄하게 울린다. 지난했던 너의 이번 생이 이제 정말로 끝이 났구나. 그러니 이제 나도 그만 너처럼 바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떠나기 한 두 달 전이었던가. 너는 내게 불쑥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냐고 물었고 난 주저 없이 히말라야라고 대답했다. 내 말이라면 바보같이 무조건 다 믿어주던 그저 착한 너는 고개를 조용히 돌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히말라야...라고 되뇌었다.  그러니 넌 지금은 설산의 바람 되어 내가 있는 이곳으로 다시 세차게 불어오는 중이리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했으며, 삶의 지난 모든 고통과 행복을 기꺼이 온 마음으로 가득 끌어안아 함께 해 주었던 나의 소중한 친구. 글을 쓴다면 내 생애 최고의 친구였던 그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쓰고 싶었다. 그가 바람처럼 훌쩍 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여전히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친구이며 내 가슴속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네팔에 가서 함께 히말라야를 보기로 했던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그 약속을 아직도 소중히 잊지 않고 있다고.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아직도 널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부디 잊지 말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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