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보내기
성실한 모습이 내게 있다면 그 영향은 100% 아빠로부터 받은 것일 것이다.
내가 처음 기억에 남아있던 때부터 마지막까지 N잡 하셨던 분이니까.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당시 한국통신(현 KT)에 재직하셨고
논, 밭농사도 하셨다.
새벽에 논일, 일과 중 회사, 퇴근 후 밭일.
이게 아니면
새벽에 밭일, 일과 중 회사, 퇴근 후 논일.
겨울 주말엔 근처 김 생산 공장에도 나가셨다.
덕분에 그와의 여행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대화한 기억도.
아주 어려서 ‘포청천’이라는 드라마를 같이 챙겨 본 기억이 유일하다.
그래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의 정을 느꼈다.
예를 들면,
중학생 때 한자사전을 준비하지 못해 아버지에게 연락하니
휴대용 사전이 아닌,
서점에서 가장 비싼 듯한 백과사전 두께의 사전을 구입하여 학교에 오셨었다.
언어나 스킨십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라 짐작했다.
그는 성실하고 묵묵한 소 같은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놀 줄도 몰랐다.
내가 사회 초년생 때
그런 아빠와 엄마 사이에 이혼 이야기가 오갔다.
둘 사이의
아니 어색한 가족들 간의 대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향집에 몇 번의 방문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대화를 거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 나간 그가 집으로 전화했고,
전화받은 내게 ‘엄마 집 내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요구를 했다.
‘무슨 소리냐. 와서 얼굴 보고 진득하게 이야기하자’는 내게
그는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 ㅅㅂ 니 ㄴ이 뭘 안다고 지껄여’
이 날 이후,
당사자들이 이혼 후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남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다 당시 만나던 여자와 재혼했고,
그 여자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 경험이 내겐
타인의 말에 대한 신뢰를 낮추고,
웬만큼의 행동으로도 믿지 못하게 하는
즉, 인간에 대한 기대감이 낮도록 확고히 해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프레임을 타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나 스스로를 깨뜨리기 위해
글을 쓴다.
전혀 다른 타인을 고정된 프레임으로 보지 않길 바란다.
쉽지 않아도 진정으로 바뀌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