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앞쪽은 도시의 한적한 공원, 벤치에 두 연인이 앉아있다. 혁수와 미영. 둘 사이 분위기가 냉랭하다.
미영: 우리 그만 만나.
혁수: 무슨 소리야. 웬 뜬금?
미영: 암튼 그만 만나.
혁수: 왜? 무슨 이유야? 괜찮은 놈 생긴 거야?
미영: 무슨. 이유 없어.
혁수: 이유가 없다니? 굴뚝에 연기 나잖아.
미영: 암튼 그만하자고 했잖아. 됐어.
혁수: 아니, 연기만 내고 됐다니? 너, 지금......
미영: 됐고요. 이제부턴 전화도 하지 마.
혁수: 너, 늘 이런 식이야. 어휴.
미영: 그래, 난 이런 식이야. 그러니 됐지?
조명 페이드 아웃되었다가 다시 들어오면 무대 상수, 혁수팀이 클라이언트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다.
혁수: 이상 저희가 준비한 피티를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부장: 지금 저 모델 문제 좀 있잖아요?
혁수: 예, 모델은 컨셉하고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부장: 그게 아니라. 모델이 지금.
혁수: 예, 제시한 모델은 가격 대비 가성비도 높다고 봅니다.
부장: 아, 참. 말귀를. 그만 됐어요.
조명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하수에 혁수가 전화를 받고 있다.
혁수: 뭐라고요? 예? (사이) 성민이가 어쨌다구요? (사이) 엥?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사이) 정말예요? (혁수,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린다.)
하수의 조명 꺼지고 상수의 불이 켜진다. 장례식장이다. 성민이 형 성규를 비롯해 몇 친구들이 내려와 앉아있다.
성규: 어서 와라, 그래두 부랄 친구라구 빨리 달려왔구나.
혁수: 어떻게 된 거예요?
성규: 우선 한잔 받아. 어째, 이런 일이.
혁수: 언제 그랬대요?
성규: 어젯밤에.
혁수: 아니 어머님이 뭐랬길래.
성규: 그치 않아도 지난번에도 한번 이런 사단이 낳지 않았냐. 밭에 농약병 쥐고 쓰러져 있는 걸 아랫집 복남이네 아저씨가 어떻게 발견해 바로 119 실려가 위 세척했잖아. 성민 어머니가 얼마나 놀랬겠냐. 겨우 살아난 아들을 보고 화가 난 마음에 하신다는 말이 ‘앞으로 죽을래면 제대로 먹고 팍 죽어버려.’ 이러셨다는 거야. 어머니가 좀 화가 나서 하신 말씀이겠냐. 친구들은 다 서울 가서 어쨌든 벌어먹고사는데 이 놈은 손톱만 한 밭떼기 갖고 혼자 버틸려니. 어쩌다 들인 아내도 못살겠다 야반도주하고. 느는 게 술밖에 없던 차에. 이 놈, 그저 어머님의 진짜 속내는 모르고, 그냥 엄마가 뱉은 말에 섭섭했던지 이번에는 진짜로 제대로 마시고 가지 않았겠냐.
혁수: 아무리 그래도.
성규: 그러게 말이다. 아들이 좀 안 돼 보이고 불쌍해서 한 말이겠냐. 말보단 심중을 읽어야 하는건데. 물론 어머니도 말이 심하시긴 했지만. 암튼 안 됐어.
혁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술잔을 비운다)
성규: (잔을 채우며) 혁수, 넌 잘 지내지?
혁수: (잔을 받으며) 아, 예.
상수의 불 페이드 아웃되고 하수의 조명 들어온다. 첫 장면의 같은 공원 벤치. 혁수 혼자 앉아 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
혁수: (뭐라 중얼거린다) 심중, 심중이라. 심......
그때 상수에서 미영이 나타난다. 심기가 불편한 상태이다.
미영: 안 만난댔는 데 왜 또 불렀어?
혁수: 어? 어.
미영: 전화하지 말랬잖아.
혁수: 아니, 넌 또..... (혁수 무언가 말하려다가 참는다.)
미영: (입을 삐죽 내민다.)......
혁수: (부드러운 말투로) 보고 싶었어.
미영: 칫,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혁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잘 못한 게 많은 거 같아. 오늘 얘기 들어보고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그래, 네 맘대로 해.
미영: 난, 할 말 다 했어.
혁수: 지난주 우리 만난 지 100일이었지? 미안하다. 난, 깜박했어.
미영:......
혁수: 난, 그냥 갑자기 그만 만나자고 해서. 이유도 모르고 그만 화부터.
미영: 늘 그렇잖아.
혁수: 그랬지. 미안하다. 앞으론 조심할게. (등 뒤에서 장미 두 송이를 내밀며) 늦었지만 짠.
미영: 칫, 뭐야. 유치하게.
혁수: (혼잣말 비슷하게) 심중.
미영:?
혁수: 아니, 너 얼굴 보니 배고프구나. 가자.
미영: 아냐. 나, 아직.
혁수: 왜 그래. 얼굴에 쓰여 있는데. 뭐 먹을래?
혁수 일어나서 미영의 손을 잡아 끈다. 미영 억지로 일어나는 척 하지만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조명 하수에서 상수로 바뀐다. 앞의 회의실 장면이다.
전무: 그 헤드라인 색깔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혁수: 네? 이건 컨셉과 딱 맞는...(말을 잇다가 혁수 잠깐 머뭇거린다. 생각을 잠깐 하더니) 아, 네. 색깔이 이상하게 느끼셨군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혹시 어떤 점에서 이상하게 느끼셨는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전무: (반색하며) 아, 뭐, 별건 아니고요. 경쟁사가 쓰는 색깔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혁수: 아,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맞습니다. 이 색깔은 경쟁사가 5년 전까지 썼던 칼라인데 지금은 다른 색을 쓰고 있습니다.
전무: 아, 그래요. 그러면 뭐.
혁수: 이 색깔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우리 컨셉과 맞는 이 칼라를 앞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전무: 그래요. 좋아요. 그렇게 가 봅시다.
무대 어두워지고 하수에 불이 들어오면 혁수 신혼집이다. 시계는 밤 12시가 넘었고 혁수가 술에 취해 문 앞에 서 있다.
혁수: 아, 또 늦었네. 와이프 뭐라 난리 칠 텐데. 아...(잠깐 멈칫하더니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래. 사랑해, 한 마디 하면 끝이지 뭐. 오케. (벨을 누른다.)
미영: (안에서 문을 열며) 으이그. 또야? 지겨워.
혁수: 사랑......(부드럽게 말을 하려다가 화가 나서) 뭐가 또야?
미영: 허구한 날 술이야. 지긋지긋해.
혁수: 아니, 내가 늦구 싶어서 늦었어? 나두....(뭐라 말을 이어 가려다가 잠깐 생각을 한다.) 어휴. 그래.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예유.
미영: (쳐다보며 의아해한다.)
혁수: 사랑해요, 미영 씨. 날 보고 싶었단 얘기지유? 자. (미영을 안아준다.)
미영: (혁수 품을 빠져나가며) 으이그. 웬 안 하던 짓을. (그러면서도 표정은 밝다.)
혁수: (방백으로) 맞아. 심중. 아, 득도의 길이런가.
무대 다시 상수로 바뀐다. 혁수, 친구 종민과 한 잔 하고 있다.
종민: 야, 그만해라. 오늘 잘 달린다.
혁수: 그래. 달린다. 잘 달리고 싶어. 자, 건배.
종민: 요새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기분 업 되어있어.
혁수: 업? 업, 그래. 업 됐지. 그놈의 심중, 심중.
종민: 심중?
혁수: 야, 너 진시황이 왜 망했는지 알아?
종민: 진시황? 웬 뜬금?
혁수: 후훗. 그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며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도 한 문장을 잘 못 해석해 망한 거란 말씀이야.
종민: 한 문장이라니?
혁수; 그래, 앞을 내다보는 노인이 진나라는 호(胡) 때문에 망한다고 한 거야. 그 말을 전해 들은 그 호가 당연히 북쪽의 흉노족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열심히 만리장성을 쌓은 것 아니겠어? 그러느라 국력을 낭비하고, 큰 아들까지 보내서 중앙엔 환관들이 들끓게 되었지. 그런데 그 호자가 사실은 흉노의 뜻이 아니었어.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가 승상 이사와 짜고 똑똑한 첫째 아들에게 자진하라고 거짓 명을 내렸지. 그리고 자기에게 편한 둘째 아들을 허수아비로 승계시킨 거지. 그 둘째 아들 이름이 호해였거든. 그놈 대에 나라가 망치게 된 거야. 진시황은 열심히 통일만 시켜놓고 20년도 못 가는 헛 짓만 한 거라 봐야지.
종민: 그래서. 진시황이 뜻을 잘 못 해석했다?
혁수: 무슨 말이나 겉에 나타난 말만 가지고 해석하면 일을 그르치게 돼. 그 속에 품은 심중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어. 그냥 상대가 뭐라 하면 그 말 자체만 듣고 화를 내던가 잘 못 해석해서 손해를 많이 봤지. 그 사람 말하는 괄호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뜻 아니겠어?
종민: 쉽지 않은 얘기야. 심중이라.
혁수: 너, 네 와이프가 갑자기 전화해서 ‘자기 나, 사랑해?’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거야?
종민: 뭐? 사랑해? 그야. 뭐...‘나도 사랑해’라고 하겠지.
혁수: 그래서 쉽지 않은 거야. 와이프의 그 말 뜻을 헤아려야지. 심중을 말야.
종민: 그래서? 무슨 뜻인데.
혁수: ‘나, 사고 싶은 게 생겼어.’ 이 뜻이라구.
종민: 뭐? 크크. 아무렴?
혁수: ‘여보, 진짜 나 사랑해?’ 하면?
종민: 야, 어렵다. 이건 뭐야 또.
혁수: ‘여보, 나, 저질렀어.’
종민: 캬. 그럴듯해.
혁수: 자, 술이나 먹자. 건배.
종민: 그래, 심중을 위해.
무대 페이드 아웃되며 막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