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그만큼 젊은 시절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도 흔치 않다.
물론 유리알 유희와 크눌프의 여행 애창자인 헤르만 헤세, 이성적이며 해학적인 버트런트 러셀, 과학철학의 대가 라이헨바흐 등 좋아하는 인물도 많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역학적 관계를 이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제시한 이가 또 있을까 싶다.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에서 던져지는 그의 현실적인 지적과 제안은 동서양 철학의 구분 없이 공감케 한다.
특히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던지는 현대인의 심리 기제는 놀랄만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니까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경쟁은 끊임없는 불안과 고독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불안과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권위에 자유를 기꺼이 반납한다’는 그 . 그 권위가 바로 회사이며 조직이며 연봉이며 갑질인 것이다.
프롬은 근대 이후 자유로워진 인간이 불확실한 상황으로 내몰려지고, 이것이 고독감을 야기하고 개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 불안감을 잊으려고 인간은 노동에, 술에, 성에 매달려 보지만 채워지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시작한다고. 그러나 문제는 외로워서 시작하는 사랑은 상대에게 의존적 사랑이 되기 쉽고 이는 곧 상대에게 예속적이 되고 억지로 같아지려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같아지기위해 서는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이어지고 결국 오래갈 수 없는 관계가 된는 것이다. 말해서 가짜 사랑이다.
프롬이 말하는 가짜 사랑의 세 가지 유형. 어쩌다 보니 나는 그 세 가지를 다 겪었는지 모르겠다.
첫째는 숭배적 사랑, 상대를 우상화해서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상대에게 복종하는, 결국 상대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실망과 불만이 크게 된다는 사랑이다. 나에게는 신이나 역사적 영웅, 지식인에 대한 사랑이 그에 해당된다. 그러나 달의 뒷면을 보듯이 그들의 다른 면을 보았을 때의 실망감은 실로 클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감상적 사랑, 사랑에 너무 많은 낭만을 부여해 현실적으로 만족감을 얻기 힘든 경우이다. 누가 얘기했듯이 숭배적 사랑이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다면 감상적 사랑은 ’사랑‘에 대한 기대가 큰 경우이다. 드라마나 소설 같은 환상을 갖은 사랑, 나도 대학의 연극반 시절 그런 상대가 있었다. 연극의 주인공과 같은 성격을 가진 상대로 사귀었으나 그것이 착각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안 된 후였다. 그냥 평범하고 심심한 상대일 뿐이었다.
셋째, 투사적 사랑, 나의 부족함을 상대방이 채워주기 바라는 사랑이다. 정작 갈등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잊고 상대에게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갈등이 야기되는 유형이다. 내 경우를 보면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교적 사랑을 많이 받은 터였다. 어찌 보면 상대가 끊임없이 사랑을 해주는 것을 원했는 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그런 여인을 잠깐 만난 적이 있다. 만나면 포근하고 항상 감싸주는 그런 모성애적 연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수록 내가 어리광을 부리면서 진짜 막내의 성격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국 피곤함을 못 이기던 상대는 떠났고 나는 한때 상대를 원망했었다. 사실은 상대도 누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점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기적인 사랑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됐든 프롬은 진정한 사랑이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으로 ‘각자의 다른 개성이 서로 존중받고 유지되는 관계가 될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서로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주체임을 인정하고 상대의 결정과 판단을 인내심 있게 응원하는 관계, 그러한 관계가 진정 지배와 속박을 벗어난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한다. 그의 주요 저서의 제목처럼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말고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응원하라는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특히 결혼생활은 위의 세 가지 유형이 종합세트로 엮인 경우가 많다. 시간이 갈수록 숭배의 대
상은 경멸이 되고, 낭만은 현실이 되고, 자신의 욕망은 불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쟁을 통해 소유를 얻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의 독립적인 존재 가치를 조건 없이 응원하라는 말은 화두처럼 들린다.
사실 프롬의 일갈은 화두이다. 그것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과 결을 같이 한다. 나의 욕심을 내려놓는 일, 放下着. 그것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삶 아니겠는가.
사랑의 기술은 진정 비움의 기술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