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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Nov 29. 2023

사랑은 루틴이다

꿈은 친절하다. 아침마다 진땀을 흘리며 배웅을 나온다.

아직도 20년 전 경쟁 PT에서 심장을 졸이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오거나 엉뚱한 실수를 밟게 될 량이면 어김없이 타임슬립이 되어 현실로 보내준다. 아니 처절한 현실에서 안도의 꿈으로 빠져나오는 건가. 어쨌든 슬립(sleep) 상태에서 슬립(slip)되어 나오는 나를 꿈은 굳이 배웅을 나오겠단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슬립영화처럼 악몽이 반복되지 않으니 말이다.   

   

간신히 꿈을 떼어놓고 나면 자유란 놈이 아늑하게 나를 감싼다. 새벽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내가 내 맘대로 시간을 써도 되는 자유. 그동안 돈에게 내 몸을 팔아왔던 창부 같은 시간이 얼마였던가. 그래서 내가 창부타령을 즐겨 부르는 건지. 여유가 있는데도 아직 그 자유가 부담스러워 다시 몸을 팔러 사창가를 기웃거리는 친구도 많다. 에리히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예견했던 상황이다.      


어쨌든 깃털 같은 마음으로 아침을 잡고 기지개를 켠다. 누운 채 간단한 체조를 한다. 몸도 눈을 뜰 시간을 주는 것이다. 손목과 발목을 털어 주고 허리 근육을 깨운다. 예전에 근육이 잠에서 덜 깬 상태로 테니스를 치다가 디스크란 놈이 찾아온 적이 있다. 당해봐야 조심을 하게 된다. 이제 창문을 열고 블루투스를 켠다. 몸을 풀었으면 오감을 깨워야 한다. 좋아하는 네팔 라디오 FM을 부른다. 설산의 상쾌한 향이 거실에 퍼진다. 때론 바하마의 재즈를 모실 때도 있다. 대서양의 진주색 바닷바람이 볼을 스친다.    

  

자, 이제 미각의 세계로 가야겠지. 주방으로 가서 프라이팬을 잡는다. 하루라는 스위치를 올리고 올리브기름을 두른다. 냉장고를 열고 부화를 포기한 계란을 꺼낸다. 아침을 외치는 암탉소리가 올리브 그늘 아래서 튀어나온다. 이번엔 과수원으로 가서 사과와 배를 딴다. 가을의 맛과 미용을 선사하는 과일이다. 다음은 목장, 요구르트와 치즈를 꺼낸다.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질소라는 성분이 지구에 생명체를 만들어 주었다는 바로 그 단백질. 오늘도 이 치즈를 먹고 어느 별 누구의 몸과 마음에 예기치 않은 자극을 뿌릴지 모를 일이다. 이젠 밭으로 가 생강으로 만든 조청을 따르고 견과류를 빻아 넣는다.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피를 맑게 해주는 영양소다. 마지막으로 냉동실에서 백설기 떡을 꺼내 레인지에 데운다. 탄수화물이 눈처럼 뭉쳐진 에너지 원이다. 아침 준비가 끝났다. 조심스레 아내를 깨운다. 잠을 비비고 있는 아내는 아직 꿈과 노는 중이다.      


삼식이라는 말이 한창일 때였다. 나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마음으로 쓸데없는 공언을 했다. 하루 한 끼는 내가 책임진다고. 그렇게 해서 잠이 많은 아내를 대신하여 아침 셰프가 된 것이다. 일 년간 아버지요리교실을 다니면서 각종 반찬을 자랑삼아 만들어 내던 실력도 결국 내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러나 어쩌랴. 일단 한번 뱉은 것을.      


‘잘 먹었습니다’ 하는 아내의 영혼 없는 말로 식사는 끝나고 이내 설거지에 들어간다. 그릇과 함께 어제 하루의 지저분한 마음도 지우는 의식이다. 주방에 퍼지는 네팔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정겹다. 레쌈 삐리리, 그 팔랑대는 설산의 바람처럼 하얗게 설거지를 끝내면 이제 녹차를 우리는 시간. 마음을 비우고 날 것의 하루를 맞이하는 관문이다. 티벳승처럼 묵상으로 잔을 비운다.


그러고 나서야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하루의 머리가 제대로 시작하는 시간이다. 열 개의 손가락문을 두드리면 내 우주의 성곽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 너희 성주가 나타나셨다. 오늘의 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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