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찌뿌둥하다. 좀 쉬고 싶은 날이다.
친구의 전화에 답한다. 우리 집 근처로 와주면 잠깐 나가 볼 힘은 있을지 모른다고. 그냥 해 본 소리다. 그런데 좀 있다 전화가 온다. 어디로 가면 되냐고. 잔잔한 바람이 분다. 그게 친구다. 물론 나도 친구를 찾아 그런 적이 몇 번 있다. 그냥 보고 싶은 대상, 철조망이 쳐져 있어도 낮은 포복으로라도 다가가고 싶은 존재. 그게 친구인가 보다.
친구(親舊)를 한자로 보면 옛 것에 친하고 싶어 하는 또는 가깝게 오래 사귄 상대라는 뜻이다. 벗이라는 단어는 더불다는 어원이 있다. 아니, 다 벗고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벗이라고 자신 있게 정의하는 친구도 있다. 암튼 그런 친구를 오늘 만났다. 우리 사이는 하도 오래 만나 별 할 말이 없다. 그저 표정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15% 만이 말로 표현된다고. 나머지는 표정이나 행동, 제스처로 다 전달된다고. 오래된 부부가 석양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있을 때 그들이 수다를 떠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 그런 친구가 가끔 요동을 친다. 가자지구가 된다. 내 주장을 몰래 인질로 훔쳐가서 역으로 억지를 부린다. 그것을 찾아오려 공격을 하면 민간인이 희생되듯이 우리의 원만한 관계 또한 어긋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나의 분신으로 알고 있던 존재가 갑자기 적군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대놓고 공격을 하고 있으니. 방어 본능이 튀어나온다. 태풍인지 폭풍인지 한차례 몰아친다.
오늘도 그랬다. 예를 들어 그 친구는 그리스 크루즈를 한번 다녀온 뒤로 더 이상 아름다운 데는 없으니 여행 다닐 필요 없다고 한다. 나는 웃으며 더 좋은 곳을 다녀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친구가 열을 내기 시작했다. 토론이 이어지고 파도가 일었다. 그의 MBTI는 INTP, 나는 ENFP.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고양잇과인 그의 입장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일 수 있다. 개과인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일 수 있다. 결국 한차례 바람이 지나갔다. 이윽고 조용해졌다. 그래, 우리가 이걸 가지고 이렇게 싸울 이유가 있었나? 서로의 가벼운 사과로 바람이 잦아든다. 태풍이 지나가면 바다가 뒤엎어져 녹조현상이 없어지는 순기능이 생긴다고 했다. 그런 식이다. 마치 연인 같다. 수 없는 바람이 지나가면서 사랑의 깊이가 더해지고 득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바람은 집이 없다는 어느 작가의 말. 바람은 불고 있을 때만 바람인 것이다. 불지 않을 때 바람의 존재는 없다 했다. 연인이나 친구사이도 마찬가지다. 제일 무서운 것이 바람이 없는 무관심일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뜻은 무언가 생동한다는 것. 싫다는 것은 싫다는 이유를 없애주면 좋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끔은 큰 바람이 불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미움이나 오해를 해소할 좋은 기회이다. 더구나 살랑이는 바람은 어떤가. 내 뺨을 간지러 주고 나를 북돋아주며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바람. 물론 가만히 있어도 좋은 친구가 좋다. 그러나 그 속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바람은 늘 불고 있다. 관심의 바람, 이해의 바람, 사랑의 바람이.
오늘 찾아온 친구가 고맙다. 내 스러진 마음에 바람을 일으켜준 존재. 태풍으로 갔다가 산들바람으로 끝난 바람. 답답했던 가슴에 신선한 산소를 가득 넣어준 친구.
그래, 가끔은 태풍이 와야 한다. 불어야 바람이다. 친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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