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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May 13. 2019

[초기 르네상스] 아름다움의 시작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2012년, 우피치 미술관 후기]

  

  수년 동안 유럽 여행을 다니며, 웬만한 미술관을 많이 다녀봤지만, 첫 미술관만큼은 또렷하게 생각납니다.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었지요.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교과서에 보던 작품들이 말 그대로 즐비합니다. 르네상스가 태동했던 도시답게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화가들의 컬렉션이 일품이지요.


  긴 시간 동안 미술의 역사는 실존과 관념 사이를 반복해 왔습니다. 마치, 낮과 밤처럼 말입니다. 고대 동굴 벽화가 동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했다면, 이집트 미술은 영생을 위한 관념적인 미술이 발달합니다. 이후,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르러 다시 인간의 실존적 육체미에 집중하지만, 그다음 천년은 기독교 문명이 발달하면서 종교 미술로 바뀌게 되지요. 그리고 마침내, 중세 천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금 실존적인 예술이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황금기처럼 가장 좋은 시절을 나타낼 때 종종 인용하곤 하지요. 하지만, 르네상스는 영광이나 화려함을 뜻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이탈리아어 리나스 치타(risascita, 재생/부활)에서 나온 말로 16C 미술가, 조르조 바사리가 예술가 열전에서 처음 쓴 단어입니다. 그가 부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고대 이후 쇠퇴한 미술이 기나긴 중세의 어둠을 뚫고 인간 중심의 미술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의 정신은 고대 로마의 영웅주의 같은 것이 아닌, 온화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평온한 아름다움에 대한 미술이지요. 인간의 세상... 내가 속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이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는 것이 르네상스 정신의 핵심입니다. 비록 중세시대에서는 그 즐거움을 제거했지만 르네상스는 인간과 신의 결합을 느슨하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봐야겠지요. 마치, 선약과를 먹는 아담과 이브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은 피렌체에서 꽃 피우게 됩니다. 15C 이탈리아에서 유래 없이 천재들이 집중적으로 태어난 이유를 한 가지 요소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피렌치 공국의 메디치 가문처럼 개화된 군주들이 문인과 예술가들을 옹호한 덕분에 예술적 토대가 마련했고, 중세시대 동안 억눌렸던 실존적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일시에 터져 나올 수 있었겠지요. 특히,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하고 천재들을 집합시켜 전무후무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냅니다.

마사초<성삼위일체> / 도나텔로 <헤롯과 살로메>

  메디치 가문의 든든한 지원 아래, 초기 르네상스는 위대한 세 명의 예술가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상의 돔을 세우면서 원근법을 발견하고, 마사초는 이 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하면서 미술에 깊이와 나타낼 수 있었지요. 그리고 도나텔로는 조각의 영역에서 로마 고전주의에 입각한 사실주의적 조각에 열중하게 됩니다. 특히, 원근법은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 시대의 3D와 같은 시각 혁명이기도 했지요.


  메디치 가문을 전성기로 이끈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는 절친한 화가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산드로 보티첼리지요. 그는 마사초 등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화가였습니다. 로렌초는 보티첼리를 가까이 두면서 많은 작품들을 의뢰했는데, <PRIMAVERA>, <수태고지> 등 을 제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초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걸작을 완성합니다. 어쩌면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 하나지요.


  비너스는 티탄족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했을 때, 잘린 성기가 바다에 들어가서 비너스가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작품은 바다에서 조개를 타고 온 비너스가 키프로스에 당도한 순간을 묘사했지요. 바람의 신이 비너스가 해변을 향하도록 바람을 불어주고 있고, 님프는 봄꽃으로 장식된 망토로 비너스의 벗은 몸을 덮어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물결치는 바다와 풀이 우거진 숲에서 부드럽고 뚜렷한 윤곽을 자랑하는 비너스는 궁극의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여신의 몸에 비치는 황금비율과 명암은 관능을 뛰어넘는 이상적인 완벽함을 강조하며, 애수 어린 시선과 표정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함축하고 있지요.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꽃이 피고 인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려낸 인류의 역작이라 할만합니다. 그렇다면, 15C 르네상스에 이르러 문학과 예술이 만개하게끔 그 꽃을 틔울 수 있었던 씨앗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13C에 쓰인 단테의 <신곡>이 겨자씨였다고 생각해요. <신곡>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그 내용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인물들이 복합되어 나타납니다. 또한, 단테는 교황과 부패한 성직자들을 비판함으로써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올바른 삶에 대하여 설파하지요. <신곡>은 옴니버스 소설이자, 중세 남녀 간의 성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데카메론> 등에 영향을 미치며, 르네상스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신곡>에는 르네상스로 향하는 길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그 길은 천국을 향하는 길이기도 하지요. <신곡>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지옥, 연옥을 거쳐 천국을 향해 봅니다. 어쩌면 단테의 발걸음 속에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가 녹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단테는 스승 베길리우스와 함께 9단계로 이뤄진 지옥으로 내려갑니다. 지옥의 입구에 새겨진 문구가 섬뜩하게 느껴지더군요.


<지옥편>

나를 거쳐 슬픔의 나라로 들어가라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나를 거쳐 저주받은 무리 속에 들어가라... (중략)

나는 영원히 살아 있으니,

여기로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지옥편 제3곡


  각각의 지옥에서 살아생전 다양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고통의 무게는 늘어가지요. 고리대금업자, 난봉꾼, 성직 매매자, 탐관오리...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것에 걸맞은 벌을 받고 있습니다. 불벼락을 맞기도 하고, 뱀에 물리기도 하며, 날카로운 창에 찔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지옥의 맨 밑바닥에는 은혜를 저버린 배신자들이 자리 잡고 있지요. 얼굴의 절반만 위에 나오고, 눈 밑으로는 온몸이 땅에 박혀 꽁꽁 얼어 있습니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카이사르를 저버린 브루투스 등입니다. 단테는 그곳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옥편>

너의 발걸음을 조심하라.

너의 발로 고달프고 지친 형제들의 머리를

밟지 말고 가거라.

모두가 얼굴을 숙이고 입에서는 추위가

눈물이 흘러 얼어붙은 눈에는

비탄에 잠긴 마음이 드러나 있었다.

- 지옥편 제32곡


  어떤가요? 섬찟하지 않나요? 살아생전의 죄악은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이 되고 말았습니다. 단테는 지옥의 제왕 루시퍼의 꼬리를 타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작은 굴을 통해 빠져나옵니다. 지옥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건가 봅니다. 그렇다면 연옥의 모습은 어떨까요? 지옥만큼은 아니지만 연옥도 만만치 않습니다. 생전에 죄를 범했으나, 회개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영혼들은 연옥의 산이라는 높고 험한 산에 올라야 합니다. 7가지 죄악이라고 불리는 식탐, 정욕, 질투, 분노, 교만, 나태, 탐욕에 빠졌던 영혼들이기에 정화하는 시간은 고행의 연속입니다. 질투쟁이는 눈이 꿰매진 채 채찍질을 당하고, 교만한 자는 무거운 바위를 메고 산에 오릅니다.

<연옥편>

그대를 위로 안내하는 등불이

눈부신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필요한 밀랍을

그대의 의지 안에서 찾아내기를 바라오.

- 연옥편 제8곡


  저는 단테의 <신곡> 중에 연옥편이야 말고, 우리 세상과 가장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삶의 목표 없이 방황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연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산에 오르는 것조차 시작하지 못한 영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오랜 시간 방황하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되지요. 주저앉은 것도 나였고, 방황한 것도 나였고, 일어서야 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 단테는 고백(흰 대리석), 뉘우침(검은 돌), 속죄(홍옥석)를 상징하는 계단을 지나 연옥의 문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천사 앞에서 세 차례 가슴을 치고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지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커다란 내 탓입니다”


  결국, 내 문제입니다. 천국을 향하는 첫 발걸음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서부터 찾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겪기 마련입니다. 삶이 난맥을 만날 때,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기 시작하면 풀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스스로 고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이 고쳐지길 바라겠어요? 스스로, 참회하는 순간부터 굳게 닫친 문이 열리는 겁니다.


  지옥은 남을 원망하는 소리가 가득하지만, 연옥을 아닙니다. 지옥과 연옥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언 줄 아십니까? 연옥에는 희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어려울지라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기사, 우리 삶 또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영혼들 아닌가요? 욕심내고 좌절하고 다시금 일어서고... 걸음마다 만나는 연옥의 영혼이 바로 우리들이지요.


지나간 어리석음을 슬픈 마음으로 돌아보고

내가 갈망하는 미래를 즐겁게 기다린다오.

이 계단 꼭대기까지 그대를 인도하는

덕성으로 간청하건대

이따금 나의 이름을 기억해주오.

- 연옥편 제26곡


  힘들지만 묵묵히 한 걸음씩 오르다 보면 악덕의 씨앗인 교만, 질투, 분노를 이겨내고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복의 근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껏 쌓였던 업보들도 하나둘 지워 가지요. 그리고, 알게 됩니다. 자유의지야 말로 신이 우리에게 준 만능열쇠라는 것을 요.


  단테가 강조한 자유의지야 말로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향하는 나침반입니다. 그것이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내게 달려 있습니다. 지옥의 문을 여는 것도... 연옥문을 두드리는 것도...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것 모두 말입니다. 연옥의 산 정상에 다다르자 스승 베길리우스는 단테에게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내 말이나 눈짓을 기대하지 말지니,

그대의 의지는 자유롭고 바르고 건전하다.

그 의지에 따르지 않으면 잘못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왕관과 주교관을 씌우노라.

- 연옥편 제27곡


  돌이켜보건대, 베아트리체를 만나러 가는 과정은 실로 험난했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부터 가장 어둡고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고, 바닥보다 더 아래의 심연조차 관통합니다. 그렇게 마주한 연옥의 문 앞에서는 가슴 치며 속죄하고, 이마에 새겨진 7가지 죄악까지 정화한 후에야 자유의지를 깨닫지요. 비록 스승 베길리우스와의 동행은 끝이 났지만 꿈에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시간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나타났지요. 나를 천국으로 이끌어줄 그녀가.


<연옥편>

  그녀는 천사들과 함께 영광의 빛을 받으며 하늘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영광을 상징하는 올리브 관을 쓰고, 생명력을 뜻하는 녹색 외투 밑에 하느님의 사랑인 붉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환상적인 모습에 단테는 스승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지도 못했지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함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자, 베아트리체는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직 질책당할 일이 남아있으니 울어도 그때 울라는 거지요. 참으로 매정한 말입니다. 지옥과 연옥을 거쳐 힘들게 왔는데 첫마디가 혼날 각오부터 하라니... 그리고서,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매섭게 질책합니다. 왜 그토록 스스로 성찰하는데 소홀히 하고 옳은 길을 벗어나 타락했냐고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선을 사랑하도록

내가 초대했을 때

그대가 그렇듯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버린 것은

대체 어떤 함정, 어떤 사슬을 만났기 때문인가요?

- 연옥편 제31곡


  지옥조차 이겨낸 단테지만,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매서운 추궁에 단테는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정신까지 잃고 쓰러집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지요. 작가 단테는 바로 이 부분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신곡>이라는 책을 통해 통렬히 자기반성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망각과 정화의 레테의 강물에 몸을 담그지요. 이제 새롭게 거듭나는 겁니다. 단테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지요. 그런 단테가 대견하고 안쓰러웠는지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하는 세 여인이 베아트리체에게 말을 건넵니다.


눈길을 돌려요. 베아트리체여, 눈길을 돌려요.

그대를 보기 위해 먼길을 달려온

그대에게 충실한 이에게 눈길을 돌려요.

- 연옥편 제31곡


  마침내, 단테는 뮤즈 베아트리체를 마주하고 그녀의 인도 아래 천국으로 나아갑니다. 어쩌면 르네상스의 문을 활짝 열었던 보티첼리 또한 <비너스의 탄생>을 그리면서 단테의 심정이지 않았을까요? 그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음을요. 우라노스의 속죄를 거치지 않고서는 비너스가 탄생할 수 없었듯이, 자기 고백 이후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치 햇살이 부딪치는 금강석처럼

눈부시고, 견고하고, 치밀하고, 깨끗한

구름이 우리를 감싸는 것 같았다

- 천국편 제2곡


  천국의 이야기는 성경의 인물들과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인도 아래, 월천, 금성천, 화성천, 태양천 등 9단계로 이뤄진 하늘을 차례대로 올라가지요. 단테는 점점 높이 올라가면서 천국이 지옥-연옥과 가장 큰 차이점을 알게 됩니다. 바로, 천국의 영혼들은 윗쪽이든 아랫쪽이든 각자의 위치에서 만족한다는 것이지요. 하기사, 비교가 없으니 행복할 수밖에요.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천국에 영혼이 다다를 수 있는 비결은 열렬한 사랑과 치열한 소망밖에 없음을요.


하늘의 왕국은 열렬한 사랑과

살아있는 소망이 의해

규율을 어기는 것도 용납하리니,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 조차 이기느니라.

사람이 사람을 이기는 경우와 달리

하나님의 뜻은 지기를 원하기에 지는 것이요,

그렇지만 진다 해도 자비로써 이긴다네.

- 천국편 제20곡


  심오하고 어렵지요? 오묘한 신의 섭리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는 어떠한 규율로도 속박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어버이가 자식을 아끼며, 신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모두 지극한 사랑 덕분입니다. 믿음 또한 그러하지요. 눈에 보이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소망이 있기에 확증하는 것이지요. 내가 당신을 믿는 이유는 그저 믿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마침내, 모든 하늘이 빛을 중심으로 도는 원동천(原動天)이라는 곳에 다다르고, 지극한 신의 사랑을 깨닫는 것으로 긴 여정을 마치게 됩니다. 단테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랑 가득한 지성적인 빛이요, 기쁨이 가득한 진실하고 선한 사랑이며, 일체의 감미로움을 초월하는 기쁨이라고... 현세와 지옥과 연옥, 천국까지 경험한 단테는 <신곡> 제일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난 사람과 같은 심정이니

꿈이 깨어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꿈속에 새겨진 감동만은 남아 있노라.

꿈에서 본모습은 말끔히 사라졌으나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그 달콤함이 계속 방울져 흐르고 있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빠졌지만,

나의 소망과 의지는 한결같이 도는

수레바퀴처럼 이미 돌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과 뭇별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 천국편 제33곡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의 발현이 아닐까요? 인류애라는 사랑이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화풍이 나타났어도 그 정신은 6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커다란 흐름이 되었지요. 비록 찰나의 순간이라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일 년 중, 요즘처럼 화창한 날씨가 드물지만 꽃이 피고 선선한 봄바람이 가득한 오늘의 기억으로 힘겹고 추운 날도 이겨내는 것이겠지요.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날 보다 흐리고 추운 날이 더 많지만, 충만했던 사랑 덕분에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테의 여행도 꿈처럼 찰나였으나, 영원했던 것처럼요.  


  아름다움의 시작점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따뜻하며 진실하지요. 그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단테가 보티첼리고, 비너스가 베이트리체입니다. 단테의 <신곡>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보티첼리의 붓 끝에서 그 아름다움이 드러났습니다. <비너스의 탄생>처럼, 진달래가 활짝 피고 싱싱한 연둣빛 가득한 오늘, 사랑스러운 베아트리체가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단테는 천국은 알았고 인류는 사랑을 깨달았지요.


그렇게 아름다움은 시작되었습니다.

보티첼리 <PRIMAVERA>

[참고]

단테 알리기에르_신곡

구스타프 도레_신곡 삽화

차기태_단테의 신곡, 에피소드와 함께 읽기

스티븐 파딩_This is art

질 플라지_이미지로 보는 서양미술사

도병훈_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

송동훈_송동훈의 그랜드 투어 서유럽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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