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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Nov 16. 2019

[초기 플랑드르 르네상스]
용기에 대하여

콘라드 비츠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


  미술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좋은 점은 여러 가지 입니다만, 저는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이야 비디오나 영상을 통해 표현하고 싶을 것들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어도, 과거에는 오직 캔버스의 한 장면만 담아낼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그렸겠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림은 한 편의 시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 스위스로 여행 갔을 때, 마침 그 기간이 아트페어 중이었습니다. 아트페어는 세계의 수많은 갤러리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올림픽이자 거래 장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스위스의 유명 도시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는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미술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카데미 수상식이랄까요? 미술을 무척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른 일정을 모두 취소하는 하면서 갔었지요.


  마침, 아트페어 당시에 파블로 피카소 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태어나서 지금까지 피카소의 작품을 총망라하여 정리된 걸 본 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 정도 규모의 전시는 없을 것 같아요. 5살 정도 유아기부터 죽기까지의 그림 수백 점뿐만 아니라, 그가 시도했던 도자기나 조각들도 가득했지요. 그래서 제게 스위스라는 나라의 기억은 아름다운 풍광뿐만 아니라, 멋진 미술관의 나라로 기억됩니다.


  바젤 아트페어는 코엑스 박람회장을 5개는 붙여놓은 듯한 거대한 공간에 세계 각국의 미술작품이 가득했는데, 최신의 미술 트렌드를 볼 수 있는 점이 내내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미술관에 가면 거의 대부분 과거의 작품들을 보잖아요? 하지만, 이 곳만큼은 갤러리 수천 개가 밀집한 느낌이었어요. 현대미술의 총집합이랄까요?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화가들도 멋져 보였습니다. 이토록 멋진 축제를 열리는 도시의 미술관은 또 얼마나 훌륭할까요?

<바젤 아트페어>

  유럽의 수많은 미술관들을 다니다 보면 하나의 단어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에게 루브르는 ‘거대한 미로’, 바티칸은 ‘교과서에서 보던 것’ 등등이지요, 바젤 미술관으로 남는 키워드는 ‘서양 미술사 흐름’입니다. 반나절이면 둘러볼만한 규모의 건물이지만 고딕에서 플랑드르를 거쳐 미니멀리즘까지 미술사의 흐름대로 전시해 놓은 점이 인상적이었지요. 이제껏 다닌 수많은 미술관 중에서도 미술사를 공부하기에 손에 꼽을 만큼 특별히 훌륭한 곳이었어요.


  아름다운 도시에 걸맞은 유명한 작품들이 가득했지만 조금 평범한 듯 한 이 그림에 의미가 부여되더군요. 이 그림은 북유럽 초기 르네상스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유화 특유의 세밀하고 화려한 표현에 조금은 어색한(?) 비율 등이지요. 국제 고딕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작품은 초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적인 디테일, 장식적인 섬세함, 강한 채색과 궁정적인 우아함 등이지요. 이러한 특징은 네덜란드 미술을 일컫는 ‘플랑드르 양식’의 근간이 됩니다. 당시 종교적 인물과 장면은 당대 미술의 주된 주제였기에, 성경의 이야기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그려낼지는 화가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죠.


  그림의 주제는 성경인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483년, 유대인인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페르시아의 왕비가 됩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나는 관대하도다’라고 외쳤던… 그 유명한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동일인물이지요. 영화 속의 모습은 스파르타를 공격하고 악한 왕으로 비치지만 성경 속에서는 공정하고 결단 있는 왕으로 비칩니다. (역사적으로는 살라미스 해전 패배 이후 방탕한 생활 끝에 암살당합니다;;) 그림이 담고 있는 내용은 평범한 성경 속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용기라는 측면에서 그림을 보면 조금은 달리 보았습니다.


  용기는 일반적으로 개인에 관한 미덕입니다. 용기 있는 단체라는 말보다는 용기 있는 사람이 더 익숙하지요. 또, 무조건적인 선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악한 자들 중에 용기 있는 자가 있고, 착한 사람들 중에 용기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말했습니다.


“용기는, 위인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공통된 하나의 자질일 뿐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위험에 맞서고 강한 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일까요? 용기가 그런 것이라면 역사상 힘센 장사들은 모두 용기 있는 자였을 겁니다. 중요한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성경 속에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처럼 용기 있는 영웅들이 많지만, 제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가장 용감한 인물을 꼽으라면 에스더를 꼽겠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족 출신의 왕후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족이었던 탓에 총리였던 하만의 계략으로 인해 위기에 빠집니다. 그녀가 속한 유다 민족이 간계로 인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지요. 그녀의 사촌 오빠였던 모르드개는 그녀에게 유다 민족임에도 왕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라며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당시 법도는 왕비조차 왕이 부르기 전에 절대 알현할 수 없었습니다. 절대자였던 왕의 허락 없이 앞에 나선다면 죽음뿐이었죠. 반역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3일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기도를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저는 바로 이 구절이 용기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용기란 두려움을 대적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통제하는 것이지, 두려움 자체를 없앤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스더는 위기의 순간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왕에게 목숨을 걸고 나아감으로써 행동을 실현합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겁하게 숨거나, 무기력하게 있었다면 유다 족은 몰살당했겠지요. 용기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용기 낼 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장 칼레비치는 말합니다.


“용기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이며,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이다”


  도로를 건너던 동물이 차와 충돌 직전 그대로 얼어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지요. 갑작스러운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은 굳어져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온 고통과, 현재의 괴로움… 그리고 미래에 닥쳐올 혹독함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인생입니다. 이 모든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그대로 머무느냐,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용기지요. 용기는 닥쳐올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게 해줍니다.


  용맹하고, 거침없으며 늘 자신만만한 모습을 가진 사람만이 ‘용기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거창하지 않아도, 매일 겪게 되는 삶의 고단함과 언젠가 마주치게 될 운명 앞에서도 묵히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인 거지요. 성경에서는 말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리라 – 수 1:9”


  살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피할 겨를도 없이 불행이 내 앞을 가로막고, 절망의 그림자에 쾅! 하고 부딪치지요.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깊이 새겨진 괴로움은 뼛속까지 사무칩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두려움에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아픔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잔인한 운명 속에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노력 자체가 용기며, 그것들이 쌓여 우리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두려움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용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실체를 알아야 굴복하지 않는 의지도 움트지요. 에스더가 왕에게 한 걸음씩 나아갔듯이...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듯이... 천천히 그러나, 용기 있게 나아갈 때, 그 끝에는 분명히 희망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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