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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Oct 14. 2019

[성기 플랑드르 르네상스]  교만의 결과

피테르 브뢰겔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피테르 브뢰헬,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

[2018, 벨기에 왕립미술관 후기]

 

  베네룩스 여행의 마지막. 브뤼셀에 도착했습니다. 역시, 한 나라의 수도답게 많은 사람들과 레스토랑으로 북적입니다. 브뤼셀에 오기 전에 브뤼허와 겐트라는 도시도 거쳐왔었는데,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경들만 보다가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모습들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상점마다 형형색색의 초콜릿이 가득하고 노천카페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와인잔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네요.


  그랑플라스라고 불리는 시청 앞 광장은 황금빛 장식과 시청 외벽을 장식하는 수많은 조각들로 정말 화려하더군요. 나폴레옹이 왜 이곳을 두고 유럽의 발코니라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브뤼셀은 수도답게 이것저것 볼것들이 많습니다. 오줌싸개 동상도 있고 커다란 성당도 있습니다. 맛있는 요리는 덤이지요. 벨기에 홍합으로 끓인 해물탕에 맥주 한 잔 곁들으면 호사가 따로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벨기에의 느낌을 평가하자면 사이즈가 작은 프랑스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맛있는 음식과 눈요기도 좋지만 브뤼셀에 온 이유는 오직 벨기에 왕립미술관 때문이었습니다. 미술사 책을 보다 보면 종종 ‘in 벨기에 왕립미술관’이라는 문구를 많이 봤습니다. 그만큼 상징적인 작품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솔직히, 바깥에서 봤을 때는 지상 2층 정도 건물이라서 두세 시간 정도면 다 보겠거니 했습니다. 하지만,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근대 미술작품들은 무려 지하 8층에 이르는 공간에 전시할뿐더러, 벨기에를 대표하는 르네 마그리트 작품들은 아예 별도의 지상 4층 별관에 따로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루 종일 봐도 부족하더군요.


  규모가 워낙 크니 교과서에 나올만한 작품들도 속된 말로 널렸는데, 시간이 부족해 서둘러 보고 나온 점이 아쉽습니다. 플랑드르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피테르 브뢰겔 뿐만 아니라, 신고전 시대를 활짝 열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근대 미술에선 폴 고갱, 세잔, 시슬레, 반 고흐. 심지어 알폰스 무하까지 인류 미술사를 총집합시킨 것 같았습니다. 또, 잘 몰랐던 벨기에 화가들도 만나볼 수 있었죠. 감명 깊었던 작품들이 워낙 많았기에 서둘러 둘러본 벨기에 왕립 미술관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피테르 브뢰겔은 16세기 대표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입니다. 그는 북유럽 풍경화를 정립하였고 당시의 속담을 인용한 그림들을 많이 그려서 그런지, 그림을 보면 교훈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달한 경우가 많지요. 이 작품 역시 유명한 그리스 신화였던 이카루스를 주제로 그렸는데, 우리가 비교적 잘 아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미술감상이 많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작품은 비교적 쉽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역사적 사건/신화와 같이 명확한 주제가 있고 그것을 묘사하기에 적당한 지식이 있다면 누구나 쉽게 느끼고 감명받을 수 있거든요.


  이야기는 다이달로스가 크레타 섬을 탈출하기 위해 깃털과 밀랍을 이용하여 날개 두 쌍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이렇게 당부를 하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지 말아라!’


  하지만 이카루스는 자만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태양 가까이 날았고 결국 밀랍이 태양빛에 녹으면서 바다에 추락하여 죽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이 그림에서 이카루스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공사다망한 인간의 삶 속에서 그의 추락은 그저 우측 구석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킬 뿐입니다.

<추락한 이카루스>

  사실, 우리는 종종 교만은 잘난 척의 동의어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허영과 망상에 사로잡혀 내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과한 욕심을 부릴 때가 더욱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이뿐인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고집부리는 것 도 마찬가지이지요. 마음속에 오직 나만 존재하고, 남을 비교하며 배척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만한 했습니다. 내 주제를 알지 못하고 과한 욕심을 가졌었고, 그 누구보다 고집을 부렸으며, 이기적이었습니다. 겸손을 몰랐고, 그로 인한 죗값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 문구가 눈에 보이더군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부끄럽게 고백하건대,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다 될 것 같이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인간의 노력으로도 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때서야 신의 영역을 알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믿는 신은 항상 낮은 곳에서 더 큰 사랑을 베푸셨고, 스스로 낮아지고 고개를 조아렸을 때야 비로소 귀하게 여겨짐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어찌 존경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때에 저는 몰랐습니다. 제가 가진 날개가 하늘 끝까지 닿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날개가 꺾이고 떨어지자, 높이 올라간 만큼 가속도가 붙더군요. 그렇게 바닥에 내려와서야 스스로 얼마나 작고 부족한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저 그림 속 이카루스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세상 사람을 다시 보니,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분들이 많던지요. 예전에는 무시하고 얕잡아 보던 모든 이들이 소중해 보였습니다.  각각 겉모습이 다른 것처럼, 수많은 장점들이 눈에 보이더군요. 이제서야 겸손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평범하고 보통의 일을 잘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조금은 더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기 저 밭을 가는 농부처럼 말이지요. 내게 주어진 일을 고개 숙인 채 묵묵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찬 곡식을 수확하는 계절 또한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넉넉한 계절에 부는 바람처럼 시원하고 여유롭게 살아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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