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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Sep 23. 2019

[성기 플랑드르 르네상스]  평범한 느낌, 평범한 기적

피테르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피테르 브뤼헬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2015,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전 후기]


  지난 주말, 루벤스 전에 다녀왔습니다. 평소에 르네상스나 바로크 미술을 즐겨 찾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더 솔직하게 제가 했던 실수와 그 결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함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예술은 종종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니까요.



  르네상스하면 이탈리아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 등 북유럽 일대 지방)가 미술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바로 북유럽 지역에서 유화 그림이 최초로 탄생하지요. 광택과 윤기 머금은 그림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플랑드르에서부터 시작한 겁니다. 유화는 당시 채색 기술의 보편 방식이던 템페라에 비해 장점이 많았습니다. 템페라는 계란의 단백질을 이용했기에 물감이 말라버리면 수정이 까다로웠기에 빠르고 정확하게 그려야 했지요. 반면에, 유화는 그림을 고쳐 그릴 수가 있었고, 세밀한 표현도 가능했기에 화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유화물감이 가장 널리 쓰인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플랑드르 르네상스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가가 바로 얀 반 에이크입니다. 최초로 유화를 시도했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극사실주의 최초 화가 기도 합니다. 그의 대표작인 <파놀로 라니니의 결혼>은 그림 속에 거울을 두웠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모습까지 나타내었지요. 무려 500여 년 전에 이 정도 퀄리티의 그림과 센스가 놀랍지 않나요? 그래서, 플랑드르 르네상스가 유화에 기반한 세밀한 표현이 특징이라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원근법에 기반한 구도 중심의 화풍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그런 탓에 같은 르네상스 시대라도 플랑드르 지역의 그림을 보면 인체 비율이 어색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아기 예수를 그냥 작게 그린다거나, 앞쪽과 뒤쪽의 인물 비율이 안 맞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저는 원근법에 충실하되 색감이 어두우면 이탈리아, 형형 색감의 또렷한 색감이지만 비율이 어색하면 플랑드르로 화풍을 단순하게 구분하곤 합니다.


  이번 전시회의 컨셉은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에서부터 19세기 낭만주의까지 아우르는 플랑드르 미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유의 화려하고 화사한 느낌이 당시 귀족들이 선호하는 취향이 어떤 것인지도 알겠더군요. 꽤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저릿한 슬픔을 주는 작품도 있었고 글쓰기에 동기부여되는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루벤스 특유의 피둥피둥하고 건강미 넘치는 그림이 많았지요. 그러나, 정작 마음 밭을 달래주는 작품은 바로 피테르 브뤼겔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였습니다.


  피테르 브뤼겔은 플랑드르 양식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더 정확히는 몇 대에 걸쳐 플랑드르 양식을 이룬 가문이라 할 수 있지요. 그의 아버지와 형제, 조카들의 작품은 서양미술사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봄직 합니다. 그 일가가 그린 작품들의 특징은 일상이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부의 저녁식사, 시골의 결혼 잔치, 고즈넉한 마을 풍경처럼 말이지요.


  이 작품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요? 그저 추운 어느 겨울날 중세 마을 모습입니다. 제목 역시도 그렇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단어로 추측하건대 '예수와 마리아에 관한 것이겠구나'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더구나, 강렬함이 차고도 넘치는 루벤스의 그림들 가운데 있기에 더 평범한 느낌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어느 날을 그린 작품 같지요.


  그림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로마 제국의 실권을 잡은 옥타비누스는 세금과 군비확보 차원에서 모든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등록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길이었지요. 그나저나, 이 무던한 그림에서 마리아는 찾으셨나요? 생각보다 찾기 어렵죠? 바로 마차 옆, 하단에 나귀를 타고 있는 모습의 여인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 의복이 아니었다면 찾기도 어려웠을 것 같네요.


  그림 대부분의 구성은 일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냈지만 그림의 주인공 마리아에게는 평범한 날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아기가 곧 태어나려는데, 얼마나 놀랍고 신기할까요? 정말로 기적입니다. 그녀에게 일어날 기적은 이것뿐일까요? 예수 탄생 이후에 벌어질 수많은 기적들은 또 어떤가요.



  그러고 보면 사람의 느낌이라는 게 참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위적으로 강조할수록 감정은 극대화되니까요.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 가령 루벤스의 <헤라클레스>는 구도와 색감 자체를 극적으로 강조하기에 그림 자체가 클라이맥스입니다. 반면에,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같은 세속화는 일상을 표현하기에 무던한 경향이 많지요. 피테르 브뤼겔의 그림을 볼수록, 표현 방법만으로도 기적과 같은 일이 평범한 일상으로 나타낼 수 있고, 여느 보통의 날도 기적의 하루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사람 사는 일, 이성을 만나는 일 또한 그렇습니다. 첫 느낌이 강렬할 때가 있고, 무던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느낌으로 '운명이다' 싶은 경우도 있고, '그저 그런'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요. 그때의 장소, 시간, 분위기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입니다. 정형화된 그림조차 느끼는 게 제 각각인데, 사람의 느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어쨌거나 느낌이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느낌에는 내성도 존재합니다. 강렬했던 기억조차 시간이 지나면 무던해지죠. 운명이라 느꼈던 감정도 흐릿해져만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되지요. 짜릿한 기쁨과 삶의 동기가 스스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느낌을 갈구하면서 순간적 자극이 곧 기적과 같은 경험이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인생에서 강렬한 순간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나요? 슬프게도 기적 또한 일어나지 않습니다. 드문 확률에 의한 우연일 뿐이죠. 또한, 우리의 삶은 대부분 평범합니다. 심지어 그림 속에서 마리아를 보십시오. 저 모습이 특별해 보입니까? 그저 추위에 지쳐있는 한 명의 아낙네에 불과합니다. 그녀에게 일어났던 기적조차 이 그림 속에서는 일상처럼 보이지요. 모두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저 역시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을 관조하게 되더군요. 강렬한 자극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 만족을 찾고 거기에 안주합니다. 늘 새롭고 특별한 것을 찾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는 것을 알기에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너무 많은 자극들로 이미 감정이 무뎌졌는지도요. 그림 속의 사람들처럼 그저 그런 평범한 추운 겨울날처럼 하루를 살아갑니다.


  평범한 우리들도 마리아가 경험했던 기적 같은 일을 희망합니다. 강렬한 느낌으로 소망하던 일들이 이뤄지길 바라고, 평생의 베필을 한눈에 알아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인생 동안 몇 번이나 될까요? 강렬했던 기억조차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겁니다. 일상적이고 무던하게 사는 게 현시대의 인생이고 가끔 있을 소소한 즐거움이 낙이지요. 더욱이, 나이가 들수록 희열 가득했던 감정도 점차 무던해져만 가네요.


  이미 우리 곁에는 기적의 마리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사람들 눈에는 평범한 만삭의 여인일 뿐입니다. 관심 갖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솔직히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평범함과 특별함의 차이를 요. 나에게 특별한 일이 누군가에게 평범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시시각각 변하는 느낌을 쫓기엔 힘들고 민감하던 감수성도 무뎌져 갑니다. 그래서 당장의 "느낌"보다 그 안에 숨어있는 "진심"을 봐야겠지요.


  그런데,  진심이라는  본다고 보이던 건가요. 평생의 동반자도 헷갈리는  진심 아닌가요. 그저 '저게 그 사람의 진심일 거다'라고 믿을 뿐이죠. 믿는다는 건 또 무언가요? 보이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것도 인정하는 거 아니던가요? 더 정확히는 그러리라 “판단"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 쉽나요...


  무뎌지는 마음 밭에서 강렬한 느낌은 옅어지고 기적과 같은 일은 점점 요원해져만 갑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느낌에서 진심을 판단하기에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날들을 살다가 시절 인연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또 체념하며 사는 게 인생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어쩌면, 시간이 더 흐를수록 더 무덤덤해질 것 같아요. 기적의 마리아가 옆에 지나가더라도 못 알아보는 짐 찾는 농부가 그러하고, 여관에 몰려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요. 다만,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문뜩 떠오르는 의문은 하나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이 눈 내리던 곳이던가?"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은 태양과 황야의 땅입니다. 절대로 눈이 내리는 곳은 아니지요. 분명히 이 겨울 풍경은 작품을 그린 브뤼겔이 살던 플랑드르의 모습일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브뤼겔 역시도 일상 가운데에도 기적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추운 겨울에도 고되게 일하고 힘들게 번 돈을 세금으로 내는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 곁에 기적의 마리아가 스쳐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도 무던하고 평범한 삶 속에 소소한 기적은 이뤄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비록 눈치채지 못했지만 작은 일상들이 모여 기적이 이뤄지고 있음을 깨닫고 싶어요. 이 순간에도 언젠가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고, 이뤄져야 할 일은 이뤄지는. 그저 평범한 느낌에서 평범한 기적을요. 광야의 베들레헴에 눈이 내리듯... 일상의 삶 속에도 기적의 마리아가 곁에 있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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