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코 치골리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후기 르네상스에는 정형화된 구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가 시도됩니다. 특히, “매너리즘”이라는 표현법이 등장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그 말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매너리즘은 부정적인 어휘로 알려져 있지만, 미술사에서는 획일화된 표현에서 다양한 표현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요. 황금비율처럼 공식화된 구도가 아니라, 인체 비율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식으로 화가의 느낌을 살려 그려냅니다. 화가의 개성을 담은 매너리즘은 곧이어 등장하는 극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바로크 시대의 발판이 되지요.
루도비코 치골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매너리즘과 바로크를 잇는 화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특유의 왜곡은 없지만 바로크만의 강렬한 색감이 보이지요. 또한, 갈릴레오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는데, 분명히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구경했을 겁니다. 그 덕택에 과학적인 묘사로, 이탈리아 로마의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 천정화 <성모 마리아>에 그린 달을 울퉁불퉁한 크레이터가 있는 초승달로 묘사했습니다. 당시 매끈하게 그리던 종교관에서 확연히 벗어난 표현법이었죠. 그러고 보면 치골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잇는 것과 동시에 과학과 미술의 가교 역할을 한 듯해요. 냉정한 이성이 열정적인 감성을 만나 조화를 이뤘달까요?
사실, 치골리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미술사보다는 영화에서 더욱 유명한 작품입니다. 바로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 그림이지요. 제가 이제까지 본 영화 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였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였던 터라 수십 번은 본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영화 OST를 들으면 피렌체의 거리가 생각나고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애틋해집니다.
저는 피렌체를 사모합니다. 고즈넉한 붉은 석양과 수많은 화가들이 아름답게 그려낸 풍경을 사랑합니다. 제게 피렌체는 첫사랑... 또는 짝사랑 같은 도시랄까요? 첫 유럽여행이라 서툴렀고 설렜고 또 진심이었던 도시. 대성당의 두오모와 종탑, 그리고 최고의 우피치 미술관까지.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고 수백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어 담벼락조차 의미가 되는 이곳. 그래서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냉정과 열정사이>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는지 모르겠습니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인공 준페이와 아오이는 대학시절 연인이었습니다. 준페이는 열정적이었고 아오이는 차가웠지만 둘은 자석에 이끌리듯 사랑에 빠집니다. 30살이 되면 함께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하지요. 하지만, 둘 사이는 오해로 헤어지게 되고 준페이는 이탈리아로 떠나 미술 복원가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한참이지나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아오이가 밀라노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영화에서 준페이가 복원하던 작품이 바로 이 작품 루도비코 치골리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고 작품을 다시 보니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도 깨닫게 되더군요. 감독은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왜 치골리의 작품을 선택했고 또 찢겨졌는지 주관적이나마 해석이 됩니다. 이성적인 르네상스에서 감성적인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황. 바로 그 냉정과 열정 사이에 놓였던 작품을 복원하려 했고, 또 찢겨지면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팽팽하게 놓인 사랑의 상처와 복원이 아니었을까요?
<냉정과 열정사이>를 다시금 보면서 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온유하고 따뜻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고 어떤 것도 할 수 없게도 합니다. 러시아 문학자 투르게네프는 말했지요. “사랑. 오직 이것에 의해서만 일생은 버티어 전진을 계속하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살면서 겪는 수많은 감정들 중에 별거 아닌 한 가지 일”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의 냉정함에는 “나는 상처 받고 싶지 않아”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구속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무언가가 되는 건 참 불편한 일이죠. 가까워질수록 밀어냅니다. 툭툭 내뱉은 말이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마음이 너무 외로워요... 관계가 깊어질수록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외롭다 말하면서 외로움을 자초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도리어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반면, 사랑의 열정은 “너 아니면 못살아”라는 뜻이지요. 불 같이 사랑하고 뜨겁게 함께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고 상대방에게 소중한 의미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요... 차가워진 말투가, 뒤돌아선 모습이 유독 마음속에 남습니다. 변해버린 표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머릿속에는 온통 그 사람뿐입니다. 그런 탓에 집착하게 되지요.
준페이는 그림 훼손 사고 이후, 일본에 머물며 아오이가 떠나간 이유를 알게 됩니다. 모두 자기 가족으로 인한 오해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아오이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대학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죄하지요. 그리고 안부를 전하며 글을 맺습니다.
행복하라고...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사랑이란, 냉정과 열정사이를 오가면서 불같은 열정으로 사랑을 쟁취해야 하는 시점이 있고, 얼음처럼 차갑지만 그 사람을 보내줘야 하는 시점도 있다는 것을. 사랑하기에 함께 있고 싶었지만 또한, 사랑하기에 보내줘야 한다는 것을. 인연이 다했지만 함께했던 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이름답게 추억한다면, 그 무엇이든 간에 인연들은 결국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기다린다 해도
또한 평생을 바쳐 노력한다 해도,
내겐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란 있는 거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이해한다 해도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 된다 해도
나로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거다.
언제나 아름다운 주인공을 꿈꾸는 우리.
그러나 때로는 누군가의 삶에
이토록 서글픈 조연일 수 있음에...
사랑이란
냉정과 열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열정으로 다가가는 순간에도
냉정이란 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한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다해서 사랑했다면
언젠간 꼭 만난다.
인연이 잠시 멀어져도
긴 시간 동안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이렇게 그 사람 앞에 서게 된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순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 다고
난 믿고 있다.
- 냉정과 열정사이 中-
그거 아세요? 피렌체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도시였던 것을요. 단테는 천년에 가까운 중세에서 종지부를 찍고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인물입니다. 그가 일으킨 새로운 르네상스의 물결은 사모했던 여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8세의 단테는 한 살 어린 베아트리체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단테의 마음속에는 오직 베아트리체만 남지요. 젊은 단테에게는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그 역사적인 만남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때부터 사랑이 내 영혼을 완전히 압도했네"
하지만, 베아트리체가 24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단테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더욱 깊어져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아 <La Vita Nuova: The New Life: 신생>을 저술합니다. 분명히,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영감을 주는 대상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수십 년이 더 흘러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딘가쯤의 원숙하고 정제된 마음을 승화시켜 불후의 명저 <신곡>을 세상에 내놓지요. 단테의 <신곡>으로 말미암아 길고 길었던 중세는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가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준페이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복원가의 길을 걷습니다. 이번에도 루도비코 치골리의 작품을 복원하지요. 감독은 이를 통해 새롭게 잉태되는 열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영화의 대사처럼 복원은 죽어가는 것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유일한 작업이니까요.
과거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비록 찢겼지만, 새로운 <무염시태>를 통해 본인이 잃어버렸던 열정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우연인 듯 필연 듯 아오이의 30번째 생일 때, 그 둘은 약속을 잊지 않았고 피렌체 두오모에서 다시 재회합니다. 둘은 <냉정과 열정사이> OST의 제목처럼 the whole nine yards... 서로의 모든 것이 되지요.
누구에게나 뮤즈는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뮤즈와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치열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고 아픔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열정으로 불타오를 때가 있었다면 눈물로 열정을 식혀야 하는 순간도 옵니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였고, 준페이에게는 아오이였지요. 더 나아가게 만드는 존재이자 영감의 원천. 그 아픔 속에는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단테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치골리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로 문을 열었습니다. 고통이 따르기도 하지만 새롭게 나아가는 창조의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냉정과 열정사이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움과 믿음, 확신, 긴 시간들... 집착으로 밤새 괴로웠던 적도 있었고, 냉랭한 아픔으로 떠나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땀과 눈물 속에서 방황하다가 진실한 것 하나가 숨어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상처 받은 우리를 복원시켜주지요. 애틋하고 순수한 그것... 냉정함 속에서도 당신을 외롭게 하지 않고, 열정은 따뜻함으로 승화시키는 것. 과거에서 지금까지 변치 않으며 앞으로도 영원할 그것... 결국, 우리의 모든 것(the whole nine yards).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참고
: 에쿠니 가오리_냉정과 열정사이
: 이주향_격정으로 미쳐본 당신을 위해
: Davic Rhee_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