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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Mar 15. 2020

[네덜란드 바로크2] 용서

램브란트 반 레인 <돌아온 탕자>

램브란트, <돌아온 탕자>

[2018. 에르미타쥬 미술관 관람 후기]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 영국 대영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해본 사람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추운 날씨 탓에 러시아가 좋은 관광지라는 인식이 적고,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 러시아는 위험하다는 선입견도 한 몫하지요. 그러나,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반드시 방문해야 할 도시입니다.


  에르미타쥬 박물관은 제가 수년 동안 다녔던 미술관/박물관 중에 정말 독특한 티켓을 팔고 있었습니다. 바로 2 day 티켓이지요. 모든 컬렉션을 보려면 하루 만에 부족하다는 것을 미술관 측도 알았던 겁니다. 베르사유 궁전만 한 건물에 작품을 빼곡히 채워놓고, 이것도 부족해서 근대 작품은 별관 (웬만한 국립미술관 규모)에 몰아 놓었으니... 스쳐 지나듯 작품을 봐도 하루 종일 박물관을 헤매야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약탈에 의한 게 아니라 수십 년 간 러시아 왕조에서 미술품과 보물을 컬렉션 했다는 특별함이 있지요. 그래서 당당할 수 있고 작품마다 가치가 특별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에르미타쥬 박물관 말고도, 러시아 국립미술관도 있는데 규모나 컬렉션 수준도 어마어마하더군요. 제가 꼽는 미술 관람하기 좋은 도시로 파리 다음으로 규모나 퀄리티 측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꼽는 이유 입니다.


  에르미타쥬에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 많지만 램브란트 컬렉션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못지않습니다. 암스테르담은 초상화 중심의 작품이 많다면 에르미타쥬는 성경이나 신화를 그린 작품이 더 많아 공감하기도 쉽더군요. 그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던 <돌아온  탕자>



  램브란트의 이 그림... 꽤 많이 보셨죠? 성경에서 언급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램브란트 특유의 강렬한 포인트가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조차 따뜻하게 맞이한다는 내용인데, 이 그림을 보면 많은 것이 생각 들곤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용서를 구해야 할 만큼 죄를 지은 적은 없지만 지난날들의 잘못과 부모님의 사랑이 떠오르지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제법 심오합니다. 아버지는 순종했던 큰 아들보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못난 아들에게 더 큰 환대를 해줍니다. 이에 큰 아들이 헌신했음에도 탕자와 차이가 없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상식적으로 사고친 동생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데 속상할 만하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함께 있는 양 99마리보다 잃어버린 1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 더 크다고 말합니다. 좀 어렵지요? 조금 쉽게 설명하면 구원과 회개의 개념입니다. 값조차 필요 없는 큰 사랑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어렵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힘겨워하는 아들을 외면할까요? 요즘 세상이 흉흉하다지만 그래도 부성애 본능입니다. 결혼한 친구들의 sns를 보면 자기랑 똑 닮은 아이로 도배되어있습니다. '저 녀석이 원래 저랬었나'싶을 정도지요. 하기사, 자기랑 똑같이 생긴 어린 녀석이 아장아장 돌아다니면 참 예쁠 것 같습니다. 제 부모님도 아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저희 형제에게 쏟은 정은 정말 크셨지요. 부모님의 사랑은 그런 겁니다. 대가도 필요 없는 일방적인 큰 사랑...


  사실, 용서라는 주제로 램브란트의 이 그림은 썩 잘 맞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에 대한 용서는 용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무슨 뜻이냐고요? 설사,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아들은 아들입니다. 사랑의 대상이지요. 과거에도 용서했고, 지금도 용서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럴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정확히, 실수는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면 실수는 무지의 소산이기에 그것을 깨우쳐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용서는 오직 용서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만 성립하지요. 소소한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며, 마음만 먹어도 할 수 있으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좀도둑질이나 거짓말 정도는 했었기에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의 대상은 무엇이냐? 바로 의도된 악으로 자행된 범죄가 용서의 대상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의 대상을 용서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용서는 고통과 관계를 맺습니다. 악인은 이기심의 욕망을... 피해자는 복수의 욕망을 갖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이지요. 용서를 구하기까지 수많은 고뇌를 했을 테고, 그것을 용서를 해주기까지 괴로움에 잠을 못 이룰 것입니다. 미덕이 관한 많은 글을 썼지만 용서가 가장 어려운 미덕이 아닐까 싶어요. 



  살다 보면 주위 관계가 늘 좋을 수는 없기에 갈등은 미움으로 변해 편협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편협된 생각은 의도치 않은 오해를 부르고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갈등이 불행의 씨앗이라면 오해는 그것을 키워낸 달까요? 갈등으로 맺힌 증오는 결국 불행이라는 종착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그 불행들을 풀어내기는 참 어렵습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악한 마음도 커져만 가지요. 그런데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덕지덕지 붙어버린 감정들을 끊어낸다는 게 얼마나 어렵던가요? 나쁜 습관 하나조차 바꾸기 어려운데, 켜켜이 쌓인 묵은 아픔들을 웬만한 사람들이 잊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이 맺힌 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용서를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쉽습니다. 죄책감을 지우고픈 동기도 있을뿐더러, 지난 과오를 지우고 새 출발을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요. 하지만, 용서를 해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용서해주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누가 보상해 줄 것이며, 쓰라린 아픔은 누가 보듬어 준단 말인가요? 용서해주자니 아직까지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가 일렁입니다. 그렇다고 용서를 안 해준다고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을 만나게 된 내 운명을 저주하고 가슴을 치는 수밖에요…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런 행위를 용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양자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이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비를 베풉니다. 그들은 성인(聖人)이기에 가능한 걸까요? 성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용서라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연민이라는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 사람도 오죽했겠나..."


  누군가를 바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를 하기까지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욕망들을 숙성시켜야 합니다. 그 시작점이 바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이지요. 다만, 끓어오르는 분노는 감정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불꽃같은 증오를 감정만으로 막겠어요? 분노에 복잡한 감정들이 더해지면 원한이 되는 법입니다. 따라서 용서는 그 어떤 것보다 지적인 미덕입니다. 신중과 절제처럼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지요. 다만, 그것들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지적인 판단으로 시작해서 감정적 마음가짐으로 끝을 맺습니다.

램브란트, <다윗왕과 압살론>


  용서는 잊어 주는 게 아닙니다. 죄 자체를 지워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증오를 멈추는 것이지요. 악인에게 악인을, 증오에 가득 찬 사람에게 증오를, 원한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원한을 맡기는 겁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거지요. 과오는 그 자체로 기억하면 그뿐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여 과거에 얽매여 있던 고통들을 훌훌 털어버리는 겁니다.


  기꺼이 싸울 수 없다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낫습니다. 분연히 싸우던지, 은밀히 복수하던지, 저항조차 하지 않을 거라면 그를 용서하는 게 낫습니다. 지긋지긋한 분노와 복수의 욕망에서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요? 복수를 다룬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은 말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화살에 꽂혀도 죽은 듯 참는 일이 옳은 길인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거센 파도처럼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길인가”


  이토록 어두워진 그 마음을... 용서는 바로 이 고통을 끊어냅니다. 질기고 긴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게 해주는 미덕이 바로 용서지요. 그래서 용서는 가장 어렵지만 가장 큰 효익을 주는 미덕입니다. 받는 사람도 해주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소용돌이치던 증오와 질긴 인욕의 세월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요. 죄인은 용서를 받음으로써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나는 그를 용서해줌으로써 고통에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용서의 끝은 반성입니다.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나를 용서하는 이지요. 고통과 복수의 무게로 짓눌리던 내 자신의 못난 모습을 지워내고 긴긴 시간 동안 괴로움에 사무쳐 허비했던 날 들에게… 조금 더 용기 내지 못한 내 모습에… 조금  너그러웠다면 달라졌을  인생에 속죄하는 이지요.



   용서가 수많은 미덕 가운데 특히 위대한 이유는 그 끝내 다스리지 못한 내 마음을... 한 없이 아파하고 분노했던 못난 내 마음조차 다독일 수 있음이 아닐까요? 쓰라린 기억, 인연의 아픔, 돌이킬 수 없는 상처조차 치유해주는 마법이 바로 너와 나를 “용서”하는데 그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참고]

미덕이란 무엇인가_앙드레 콩트-스퐁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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