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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Apr 30. 2020

[성기 바로크] 목적이 이끄는 삶

피테르 루벤스 <십자가의 예수> 연작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
<십자가에 내려지는 예수>

[2018. 안트베르펜 대성당 방문기]


  베네룩스 여행은 플랑드르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넓은 평야를 지나기도 하고 운하 가득한 도시를 거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다 보면 어느덧 네덜란드를 거쳐 벨기에에 도착합니다. 벨기에는 지리적으로 유럽 중심에 있는데, 동쪽은 독일, 서쪽은 영국, 북쪽은 네덜란드, 남쪽은 프랑스가 있지요. 근방에 강대국이 모여있는 형국이랄까요? 그런 까닭에 벨기에는 침략당한 역사가 많고 지역에 따라 근처 강대국의 영향을 받아 언어도 여러 가지를 씁니다.


  반대로, 주요 유럽 국가들의 한가운데 있다 보니 EU 본부가 벨기에에 있을 수 있는 혜택(?)도 주어졌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찾는 나라는 아닙니다. 유명한 거라곤 와플과 홍합요리 정도랄까요?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은 만화의 나라라는 것과 오줌싸개 동상이 있는 것 정도 아는 게 대부분입니다. 저 역시도 그 정도로만 알았지요.


  어쨌든, 네덜란드를 거쳐 벨기에 첫 번째로 닿는 도시는 안트베르펜이 됩니다. 별로 들어본 적 없지요? 하기사 벨기에도 생소한데 안트베르펜이라는 도시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혹시 네로와 파트라슈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제 나이 또래의 사람이라면 아련하게 아프면서 잔잔한 기억이 날 겁니다. 바로 <플란다스 개>의 주인공이지요. 여행과 마술 작품에 관한 글을 쓰다가 갑자기 <플란다스의 개>가 나온 이유는 그 배경이 바로 벨기에 안트베르펜이기 때문입니다.


  안트베르펜에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네로의 삶의 목적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추억을 삼아 <플란다스의 개>를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풍차와 초원 위에서 뛰어놀던 네로와 파트라슈가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동화 속 플란다스(플랑드르)는 이렇게 묘사됩니다.

<플랑드르의 풍경>


  "플란다스는 푸르고 비옥했다. 지루하고 단조로웠지만 드넓은 지평선이 가진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운하 주변의 골풀 사이에는 꽃들이 피었고, 싱그러운 나무들도 우뚝 서 있었다. 거대한 배들을 뒤로한 채 태양을 향해 가고 있고, 배에 실린 작은 통들과 펄럭이는 색색의 깃발들이 나뭇잎을 배경으로 멋진 광경을 만들었다"


  이미지가 그려지시나요? 이토록 아름다운 안트베르펜은 피테르 루벤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루벤스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출신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그는 분명히 벨기에 출신이지요.


  루벤스 작품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풍만한 육체, 커다란 근육, 극적인 장면 묘사의 특징을 가집니다. 루벤스가 바로크 미술이고 바로크 미술의 결정체가 루벤스입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고 표현법도 탁월했기 때문에 그 명성은 <플란다스의 개>에서도 잘 나타나지요.


  "루벤스가 없었다면 안트베르펜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저분하고 음침하며 소란스러운 시장일 뿐으로, 부두에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이 아니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곳이었다. 루벤스가 있었기에 온 세상 사람에게 안트베르펜은 성스러운 이름, 성스러운 땅, 예술의 신이 빛을 본 베들레헴이자, 예술의 신이 잠들어 있는 골고다가 되었다"

<안트베르펜 성당 내부>


  어떤가요? 이쯤이면 안트베르펜에서 루벤스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되지요? 보통 대부분의 미술작품들은 안전한 미술관에서 전시하지만 루벤스의 이 작품은 성당 내부에 있습니다. 유럽을 여행할 때 성당은 꼭 가보는 편인데, 안트베르펜 대성당만큼은 건축적 의미보다 미술 작품을 보러 가는 목적이 있었지요. 실제로 성당에 들어가 보면 루벤스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갤러리처럼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당이라기보다 거대한 미술관 같은 느낌이지요.



  <플란다스의 개>는 가난하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네로의 소망이 잘 그려집니다. 삶의 목적과 그것이 이끄는 삶의 순간들이 플랑드르의 배경 속에서 잘 나타내지요. 네로의 소원은 루벤스의 그림을 단 한 번 만이라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화 한 잎을 내야만 볼 수 있었기에 그림이 걸린 교회당 문 앞에서 항상 뒤돌아서야 했지요. 네로는 말합니다.


  "저걸 보지 못하게 하다니 정말 너무해, 파트라슈. 가난해서 돈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림은 빛도 보지 못하고 어떤 눈길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부자들만 돈을 내고 보는 것을 루벤스가 저걸 그렸을 때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만약 저걸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네로의 열정과 소망이 느껴지지요? 소년은 같은 또래의 소녀 아로아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네로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냉대합니다. 더욱이, 그가 운영하던 방앗간에서 불이 나자 네로 탓으로 여기며 사람들까지 부추겨 괴롭히지요. 이후, 네로에게는 더욱더 큰 아픔이 오는데, 바로 네로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네로는 파트라슈와 함께 살던 집에서 조차 쫓겨나게 되고 네로의 마지막 꿈이고 희망이었던 미술 콩쿠르 마저 떨어지게 되자 더욱더 큰 절망에 빠지지요.


  추운 겨울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며칠 동안 음식도 못 먹은 네로는 우연히 아로아의 아버지의 지갑을 발견하지만 곧 돌려주게 됩니다. 그리고서 평생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으로 교회당에 들어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보지요. 하지만 너무 추웠던 탓일까, 네로는 그다음 날 파트라슈와 함께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은 파트라슈와 네로가 서로 껴안고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고, 아로아의 아버지 또한 착한 네로에게 너무 냉대를 한 것을 후회 하지요. 거기에 콩쿠르의 결과와 상관없이 네로의 작품으로 가능성을 발견한 루벤스가 자신의 제자로 삼으려 했지만 결국 네로는 파트라슈와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 마칩니다.


  다시 읽어도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평생토록 소망했던 것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슬픈 소년이지요. 특히, 소설의 마지막 '사랑이 보답받지 못하고 믿음을 실천하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신은 충실한 사랑과 순수한 믿음을 거둬갔다'라는 문구가 마음을 시리게 하더군요. 세상을 살면서 진실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희망을 가졌어도 신은 그 소망과 믿음을 거둬가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아무리 노력하고 성심을 다해도 닿을 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애태워야 했나요...


  저도 네로와 파트라슈가 죽기 전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와 마주했지요. 이 작품 자체는 너무나 유명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루벤스의 작품답게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극적으로 나타냈지요. 사실 이 작품은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의 연작입니다. 두 작품이 성당의 좌우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지요.


  저는 <플란다스의 개>를 집필한 위다가 왜 루벤스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것을 골랐을 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동화  네로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최후와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었지만 전 인류의 구원이기도 했습니다. 네로 역시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로아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줬지요.


  네로는 헐벗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조차 없었음에도 삶의 목적을 놓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잘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꿈을 향해 달려갔지요. 넬로는 죽음 직전에 드디어 루벤스의 그림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나 그림을 향해 팔을 뻗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져서 창백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리며 말합니다.


"마침내 그림을 봤어! 신이여, 이걸로 됐어!"


  삶의 목적이자 목적이 이끄는 삶의 마지막 외침이 어떤가요? 비장하고 숭고한... “이제 다 이루었도다”하고 십자가 위에서 외쳤던 예수님의 또 다른 원형 같지 않나요? 저도 안트베르펜 여행을 통해 삶의 목적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더군요. 네로와 파트라슈가 삶의 목적을 예술에 두었고, 예수 역시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그 역할을 다 하였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었지요.


  누구나 삶의 목표는 있습니다. 네로만큼은 아닐지라도 세상에 소박한 꿈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제 삶의 목적을 하나 둔다면 지금까지 경험하고 쌓아온 생각들을 세상에 남기는 것입니다. 영생을 꿈꾸는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차피 늙고 죽게 됩니다. 하지만 철학과 가치관은 후대에 영원히 남을 수 있지요. 그래서 화가들은 작품을 남기고, 소설가는 책을 남기며, 남녀는 자녀를 낳아 길러 자신의 분신을 세상에 남깁니다. 저도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미술에 관한 글을 꾸준히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다음으로 이 생각을 나누고 함께 즐거워할 동반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 이니까요.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행복한 겁니다. 통상 무엇인가를 나눈다고 한다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곤 하지만, 세상에는 나눌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을 나눌 수 있고, 우정과 희망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나눠도 아깝지 않고 나눌수록 즐거워지는 동반자가 있다면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라/


  안트베르펜에 도착하기 전 머물렀던 헤이그 이준 열사의 마지막 유훈 말씀입니다. 운명을 함께 나눈 네오와 파트라슈는 조각으로 남아 안트베르펜 대성당 앞에 잠들어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살다가 동반자와 함께 떠난 네로와 파트라슈의 삶은 비극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일 겁니다. 소년의 열정과 꿈. 그리고 사랑이 영원토록 이어질 테니까요.


[참고]

: 위다_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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