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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Jun 03. 2020

[스페인 바로크]  2차원에 그려진 4차원의 세계

디에고 벨라스케스 <실 잣는 여인들>

<실 잣는 여인들>

[2016 프라도 미술관 후기]

  스페인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의 수도답게 미술관의 수준도 엄청납니다. 스페인 역사 자체가 워낙 화려했으니 뛰어난 화가들이 많았던 것은 당연합니다. 마드리드에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 3개나 있지만, 안타깝기도 일반적으로는 풍경 위주의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론다 등의 남동부 지역을 주로 다니지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드리드에 꼬박 일주일이 있어도 부족한데 말입니다.


  마드리드에는 프라도, 티센 보르네미사, 왕립 소피아 미술관이 있습니다. 그중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미술관은 누가 뭐라 해도 프라도지요. 세간에는 세계 3대 미술관을 꼽기로 뉴욕 근대미술관, 러시아 에르미타쥬, 스페인 프라도를 꼽습니다. 그만큼 프라도의 컬렉션 수준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방문해서 관람할 때도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하루 종일 ‘헤맸던’ 기억이 나네요. 다만, 프라도가 고전 미술 위주의 작품이 많은 특징을 가집니다.


  반면, 보르네미사 미술관은 과거 르네상스에서 팝아트까지 미술사의 흐름대로 전시한 특징을 가집니다. 동선조차 엄청 깔끔해서 미술사 공부하기에는 최고의 장소로 손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프라도 보다 보르네미사 미술관이 더 기억에 남아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크 로스코 작품들이 연대순으로 있었던 게 특히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는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 뿐만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 및 뒤샹 등등을 포함하여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빼곡하게 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바로크 시대가 르네상스와 다른 특징 한 가지 꼽자면 ‘화가의 수’입니다. 쉽게 말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를 꼽으라면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에 한정되지만, 바로크 시대부터 경제적 부유함을 기반으로 각 나라에 뛰어난 화가들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당장, 네덜란드 램브란트, 벨기에 루벤스, 프랑스 니콜라 푸생, 이탈리아 카라바죠, 영국 반 다이크(플랑드르 출신) 등등 바로크 시대에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위대한 화가들이 많이 등장하지요.


  이토록 훌륭하고 특별한 화가들이 많은 바로크 시대지만 그 시대에 활동했던 최고의 화가가 누구냐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한 사람을 꼽습니다. 제가 수년 동안 그림에 취미를 갖고 여러 세대의 미술 작품을 보면서, 진짜 천재가 그렸다…라고 생각되는 화가가 있는데, 그 특별한 인물이 바로 스페인 궁전 화가였던 벨라스케스지요. 솔직히 자주 들어본 이름은 아니지요?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야스마사 무리무라 <시녀들> 재해석

 

  개인적으로 19세기 마네 이전에는 그림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고민할 필요가 없는”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즉, 그림의 주제만 알고 있으면 그 표현방법을 누가 더 극적으로 표현했는지가 판단기준이었던 거죠. 가령, 똑같은 헤라클레스라도 렘브란트, 루벤스, 카라바죠의 “화풍”에 따라 감상하면 됩니다. 누구 작품은 조금 부드럽게 그렸고, 이 작품은 좀 더 과감하게 그렸네. 정도랄까요? 다시 말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신화나 성경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보는 순간 이해되기에 화가만의 특징을 담은 작품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좀 더 과감하고 극적인 느낌일수록 예술성이 높았습니다.


  반면에,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생각 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주제를 바라보며 화풍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의 “구도”와 “장치”를 이해해야만 진정한 감상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의 대표작 <시녀들>을 보면, 저 멀리 거울이 보입니다. 이 거울은 그림 속에서 매우 특별한 역할을 하는데,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에 거울을 활용하여 기하학과 공간적 착각을 극대화했지요. 상상해 보세요. 만약 왕과 왕비가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처음 섰을 때,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내가 그림 속 안에 들어간 착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시녀들>이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있는 최고의 작품이자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은 <실 잣는 여인들>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이 그림을 보면, 그냥 한낱 실잣는 풍경에 불과한데 여기에는 두 가지 놀라운 장치가 숨어져 있습니다. 먼저, 움직이는 실체를 최초로 화면에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전경에 물레바퀴를 보면, 뭔가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바큇살을 표현하지 않고 잔상으로 나타냄으로써 속도감을 평면에서 체험할 수 있지요. 이것이 첫 번째 놀라운 점입니다.

 


  후경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양탄자가 걸려있습니다. 이 그림의 가장 놀라운 장치가 바로 저 특별한 “양탄자”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 신화가 새겨져 있는데, 아라크네와 아테나 여신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아라크네라는 젊은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양탄자를 짜는 솜씨가 누구보다 뛰어났기에 자신의 솜씨가 아테나 여신보다 뛰어나다고 자만했습니다. 결국, 여신 대 인간의 시합이 벌어지지요. 아라크네의 작품은 아테나 여신조차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흠잡을 수 없었지만 그 주제가 문제였습니다. 신 조차 이길 수 있다는 자만으로 제우스가 에우로파를 납치하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신들을 조롱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그림을 수놓아 버렸지요. 화가 난 아테나는 그녀의 양탄자를 찢으며 그녀의 불경함을 벌하기 위해 거미로 만드는 형벌을 내립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에 위치한 저 양탄자 속에는 아테나가 아라크네의 천을 찢는 그 순간을 포착합니다. “그래서…?”라는 물음이 생길 수 있지만, 바로 여기서 벨라스케스의 천재적인 공간 구성력을 볼 수 있지요. 한 낱 양탄자에 불과하지만, 그림 정중앙에 배치함으로써, “공간 속의 공간이 존재"하고, "이야기 속 이야기가 존재"하며, "그림 속 그림이 존재” 하게 됩니다. 즉, 실 잣는 풍경 속에, 양탄자가 걸려있고, 그 양탄자 안에는 아라크네가 천을 짜고 있으며, 그 천 조각 안에는 에우로파의 신화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영화의 <인셉션>과 비슷하달까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거울을 통해 3차원 존재하는 감상자를 그림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였다면, 이 그림은 신화를 공간에 추가함으로써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4차원의 공간으로 확장시킵니다. 알고 보니 참 놀랍지요?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거대한 작품을 보고, ‘300년도 넘는 그 옛날에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그 창의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가요? 이쯤이면 진짜 천재라 할 법하죠?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진정으로 위대한 점은 천재라는 것 그 이상으로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동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이자, 궁중화가였던 그도 아라크네처럼 자만할 법했지요. 그런데 정작 그는 ‘나는 일개 화가일 뿐이며,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낼 뿐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을 보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그 대상을 그려냅니다. 그 통찰력은 천재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그의 기본 품성이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림 속의 양탄자처럼 마음속의 마음이 있습니다. 가끔, 스스로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이 신기할 때가 있고, 미처 알지 못했던 타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통찰력은 평정이 유지된 마음과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겠지요. 벨라스케스처럼 말입니다.

<교황, 이노첸시오 10세> /  <세바스찬> / <레스카노>


  평정심을 지니고 중용을 지킨다는 것은 정성스러운 마음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벨라스케스는 막강한 위치의 궁전 화가로써 왕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는 것에 익숙했지만, 가난한 서민들도 즐겨 그렸습니다. 그림의 대상이 교황이라도 미화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냈지요. 그가 그린 교황이나 광대들은 서로 간에 미화나 과장됨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냅니다.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가감 없이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천재라는 수식어보다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올바른 행동이 올바른 습관을 낳고, 바른 습관은 바람직한 품성을 낳으며, 좋은 품성은 결국 중용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믿어요. “평상심이 결여된 천재” 아라크네는 거미가 되었고, “중용을 지킨 천재” 벨라스케스는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된 것처럼요.



  세상을 살다 보면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기세를 펼칠 때가 있고, 낮은 위치에서 고개 숙일 날도 있을 겁니다. 부디 바라건대,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한 시선을 갖고 싶어요. 우러러볼 필요도 없고, 얕잡아 보지도 않을 만큼요. 반대로, 내 모습 역시도 그렇게 비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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