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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Jun 10. 2020

[후기 바로크] 정화의 시간

가에타노 간돌피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


가에타노 간돌피 <헤파이스토스와 아프로디테>

  

   연애상담해본 적 있습니까? 상대의 마음을 알기 어렵고 내 마음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가까운 친구와 수다를 떨 시간이지요. 처음에는 주관적으로만 내 이야기만 하다가 점점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더 신기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분석과 추측을 하다 보면 오히려 나를 깨닫게 된다는 점이지요.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시작했고 그 해답도 나에게 있던 겁니다. 잘못이 반복된다는 건 무언가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잘못을 알고 개선해야 발전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던 중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미술 작품에서 많은 주제일뿐더러 신화의 내용을 알면 인생도 해석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우스의 매력, 메두사의 실수, 페르세우스의 도전을 이해할수록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깨닫는 것들이 삶의 교훈으로 자리 잡게 되지요.


  올림포스에는 12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를 비롯해, 바다의 포세이돈, 지혜의 아테나, 아름다움의 아프로디테... 한 번쯤은 들어 봄직한 이름이지요. 그중에 헤파이스토스라는 신도 있습니다. 조금은 생소하지요? 그는 대장장이이자 불의 신이었는데, 제우스에게 벼락을 만들어주고, 헤라에게는 황금 의자를, 아테나에게는 방패를 만들어 줄 정도로 능력자였습니다.


  더구나, 아버지는 신중의 신 제우스고, 어머니는 여신 중의 여신 헤라입니다. 집안 좋기로는 최고입니다. 이뿐 인가요? 그의 아내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며 12 신 중 유일하게 근면 성실하고 능력까지 갖춘 신인데, 의외로 헤파이스토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까요?

조르주 바사리 <헤파이토스의 대장간> /  틴토레토 <비너스와 아레스의 불륜 현장을 덥치는 헤파이토스>


  헤파이스토스는 추남이고 절름발이였습니다. 신화에서는 헤라가 못생긴 아들을 땅으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는데 볼품없고 매력 없는 그를 인간들도 썩 좋아하진 않았나 봅니다. 미술에서 그를 묘사하는 작품들은 구부정한 자세로 대장간에 앉아있거나, 늙고 볼품없는 모습이지요. 특히, 아내 아프로디테가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바람난 현장을 덮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출중한 능력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외모 때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들 중에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장점이 많지만 자신의 약점 때문에 떳떳하지 못하고 움츠려 드는 유형... 그런 헤파이스토스를 보면서 저와 많이 닮았다고 느껴졌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성실하게 살았지만 마음 한 켠의 상처로 절뚝거리는 모습까지 말이지요.


  나의 절름발... 나의 흉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저에게는 언화(言禍)였습니다. 모질게 파고드는 말의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날카로운 힐난에 영혼이 산산조각 나면 깨어진 유리병처럼 바닥에 흩어져버리게 되지요. 누구든지 살면서 자신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까마득한 절망감으로 허우적거리다 무력한 세월 속에 갇힌 적이. 날카로운 비수에 심장이 찔려 철철 피 흘려 본 적이. 사랑이 집착이 되어 스스로를 지옥 불에 던져 넣은 적이. 미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미친 채로 떠돌아다닌 적이.


  세월이 흘러 시간은 약이 되고 파편 된 영혼을 주섬주섬 모으면 상처는 어느덧 흉터로 남습니다. 상처는 나았지만 흉진 자국을 보면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그 자리가 바로 나의 절름발이지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헤파이스토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내쳐지지 않기 위해... 혹은 절뚝거린다고 놀림받지 않기 위해 원칙과 기준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래야만 똑같은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을 테니까요.

파리스 보르도네 <헤파이토스의 접근을 뿌리치는 아테나>


  문제는 그 다짐이 나에게만 향하면 될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했다는 점입니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상대방을 옮아 매고 나의 기준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아집! 하지만 자유롭고 본능적인 아프로디테는 남편을 바라볼 때 얼마나 답답했겠나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쓸데없는 걱정과 원칙으로 소중한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정작 내용(contents) 무시하고 형식(formula)에만 집착했던 거지요.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됩니다. 원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소중한 건 갖고 싶고, 또 지키고 싶고, 또 그러다 보면 집착하게 되고...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지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더군요. 마음이 커질수록 욕심은 생기는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폭넓은 감정의 스펙트럼 속에서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고 결국 깊은 늪에 빠지게 되지요. 빠진다는 것은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것이기에, 이미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대만 바라보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이점이지요. 그래서 집착하게 됩니다.


  사실, 이 모든 감정의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해요. 문제는 사랑에 "빠지지" 말고 사랑을 "하는 것" 이죠. 감정은 강요할 수 없는데, 내 커져버린 마음만큼 상대에게 기대하는 일이... 사랑을 강요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그건 교감이 아니지요. 돌아온 것은 오직 후회와 고통뿐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실망하면서...  내가 기대한 정답에 부응하지 않느냐고 폭발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정답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나의 선입견이고 편견일 뿐인데.


  다시는 절름발이 되지 않겠다는 그 다짐이 마음 밭을 오히려 굳게 만들었습니다. 콘크리트 같은 뻣뻣한 마음에서 어떻게 씨앗이 자랄 수 있겠어요? 부드럽고 따뜻한 토양 위에서 사랑의 대상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상식도 소중한 것이 떠난 뒤에 깨닫습니다.


  그래도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간돌피의 그림을 보면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림 속 헤파이스토스는 늙고 추한 모습이 아니지요. 집착하지도 않고 조급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장점을 알고 그것에 몰두하는 위풍당당한 모습. 자신의 진심을 건네주는 저 모습이 아프로디테를 돌아오게 했고 그를 진정한 올림포스 신 임을 알게 해 줍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분명히 어떤 대상을 두고 자아가 강해지는 순간이  것입니다. 그때는 내면의 헤파이스토스를 달래줘야  시간이지요. 마음속 대장간에서 스스로를 옮아 매었던 집착의 사슬을 끊어 용광로에 넣어야 하고, 강철처럼 굳어버린 마음은 정화(正火)의 불로서 담금질해야 합니다. 달궈진 마음으로 두드리고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다시 새로워지는 날이 올 겁니다. 그렇게 정화(淨化)의 시간을 보내야겠지요.


  어딘가에 있을 아프로디테를 찾을 때까지... 굳어지고 뭉쳐진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참고: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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