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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Mar 02. 2019

[중세] 순수의 시대

두초 디 부오닌세냐 <성모와 아기 예수>

12C <성모와 아기 예수>

  중세시대는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가 무너지면서 시작합니다. 수백 년간 최강대국이던 로마가 무너지게 된 계기는 몇 가지가 있으나 인구가 줄고 세금은 걷히지 않으면서 넓은 영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게 된 점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중국 내의 (위진남북조) 전쟁은 훈족이 서쪽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낳았고, 도미노 현상처럼 훈족에게 밀린 고트족이 로마의 영토까지 닿게 됩니다. 과거의 로마였다면 손쉽게 물리쳤겠지만 이미 약화된 군대는 국경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웠기에 이민족의 확장은 국력의 손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던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근거지로 삼지요. 바로 비잔틴 제국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국경이 가까워 관리가 용이했고 인구도 많았으며 동서양의 무역으로 세금도 넉넉히 걷을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제2의 전성기를 누리지요. 반면, 서로마는 넓은 영토를 가졌으나 인구밀도가 낮아 모든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자 이민족들을 용병처럼 쓰기도 했는데, 강력하고 끊임없이 내려오는 훈족과 대항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조치였지요.

 

  서로마는 역량이 뛰어난 고트족 출신을 장군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훈족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기도 했거니와 고트족이 1차적인 방어막을 해준다는 점에서 힘을 합칠 필요가 있었지요. 하지만, 로마는 타민족에게 그들의 식량과 자원까지 나눠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결국, 처우가 열악했던 게르만 민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고트족 출신 오도아케르 장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찬란했던 서로마는 476년에 허망하게 멸망합니다. 서로마가 사라지게 되자, 수 백 년간 지배를 받던 토착 민족들이 융기하는데 게르만족, 프랑크족, 앵글로색슨족들이 각 지역 별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의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이지요. 이때쯤 국가 간 국경이 어렴풋하게나마 형성됩니다. 그리고, 각 민족들이 왕국을 이루고 봉건제도 중심의 약 500~1,400년 대에 이르는 기간을 중세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합니다. 신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마녀 사냥, 바이킹... 무언가 야만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시대랄까요? 솔직히 중세시대 작품을 보면 뭔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특유의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서 사람 같지 않고 외계인(?) 같은 작품들이 나타나지요. 왜 갑자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을 까요? 이점을 이해하려면 중세의 가치관을 알아야 합니다. 중세는 오로지 신(神)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그 덕분에 미술의 양상도 완전히 변하게 되지요. 더구나, 교황청의 권위는 국가 권력과 대등할 만큼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졌기에 문화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중세의 모든 가치관과 판단 기준은 이 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합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요. 생각해보세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 존재를 사람들이 믿어야만, 교황청의 권위와 왕족의 정통성이 유지될 테니 얼마나 집중적으로 연구했겠어요? 그래서 학문을 의미하는 스콜라철학이 등장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논리를 제시하지요.

 

개별자가 우선인가 보편자가 우선인가?

 

  무슨 말인가 싶지요? 쉽게 생각해서 홍길동, 황진이, 임꺽정이 있다고 합시다. 각각의 사람들이 가진 ‘특징’(개별자)이 중요할까, ‘사람’(보편자)이라는 공통점이 중요할까요?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홍길동(개별자)은 지금 당장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점에서, 공통 개념인 사람이(보편자)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홍길동이라는 개별자는 죽어도 사람이라는 보편자는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요. 이러한 관념론은 영원한 신을 증명하는 강력한 이론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교회는 신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보편적인 통일체로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독보적인 권위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보편적 관념론을 중심으로 중세철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표현 역시 개별자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성질의 것을 추구하게 되지요.

 

  바로 이점이 중세시대의 미술을 못생기게(?) 만들었습니다. 개별적 특징을 구현해 내기보다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부분을 강조하면서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지요. 눈, 코, 입의 세세한 모습보다는 그냥 눈, 코, 입이 얼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나타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점이 하나 생깁니다. 홍길동과 임꺽정이 눈, 코, 입이 달린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홍길동 그 자체를 나타내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 역사상 수 많았던 성인들과 예수님, 마리아는 대체 무슨 수로 구분하여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바로 기호와 상징이 나타내게 됩니다. 이점은 중세시대 예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지요.

<청금석>

  중세 미술을 살펴보면 암묵적인 약속이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가시 면류관에서 빛나는 광체는 예수를 뜻 하고, 가죽 누더기를 걸친 사람은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즉, 기호와 상징이 예술 전면에 나타나지요. 그리고, 이러한 상징들은 나름의 이유를 가집니다. 가령, 성모 마리아의 상징은 왜 푸른 옷이 되었을까요? 당시, 푸른색 물감은 금보다 값비싼 청금석을 갈아서 사용했어야 했습니다. 여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존재. 그녀를 표현하기 위해 금보다 귀한 보석을 갈아 만든 물감을 사용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지 않았을까요? 상징을 부여함으로써 보편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었지요.


  다만, 신앙이 최우선이 었기 때문에 여인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성성을 제거하고 모성애를 강조하는 게 더 유리했겠지요.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신앙을 고양시키느냐가 주된 목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종교에 관한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지요.

<노트르담 대성당>

  이러한 특징은 건축에서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중세시대의 높고 뾰족한 성당들도 단순히 그냥 탄생한 게 아닙니다. 신의 손길을 열망하는 중세인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지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에 닿으려면 건물은 높아야 했습니다. 또 신이 거주하는 공간은 거룩해야 했기에 천장과 기둥 또한 거대하고 웅장해야겠지요. 이렇게 하늘에 닿고자 하는 마음. 즉, 앙천성(仰天性)은 중세시대 건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어가 됩니다.

<고딕성당 내부>

  앙천성이라는 관념 아래, 종교 예식은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부속설비가 필요해집니다. 노래를 부를 성가대가 있을 위치(apes)가 필요하고 예배 중에 교회 전체를 도는 예식이 생기면서 측량(asile)도 생겨납니다. 성물을 보관할 콘페시오, 뿐만 아니라, 신은 곧 빛이었기에 교회 내부로 빛이 충분히 들어와야 했고, 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아름다운 빛을 내부로 비추면서 더욱 성스러운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지요.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고자 지금 우리가 잘 아는 중세 교회의 성당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제가 유럽을 여행할 때 미술관만큼이나, 꼭 찾는 곳이 바로 성당입니다. 거대한 성당에서 천년 간의 시간 동안 간직했던 그들의 열정과 소망을 마주하면 숙연해집니다. 천년의 시간 동안 그들이 하늘에 닿고자 고민했을... 성의롭고 귀한 공간을 볼수록 많은 것들을 느끼지요. 단언컨대, 인류 역사상 중세 고딕의 성당만큼 비효율적인 건축물은 마주하기 어려울 겁니다. 오직 신앙심만으로 수백 년에 걸쳐지을 건물은 앞으로 나오진 않겠지요. 또한, 그렇기 때문에 순수함으로 이룩한 거대한 공간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중세시대를 암흑의 시대로 평가할  수 있어도, 제게는 이러한 모든 것은 순수함이 동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암흑기가 아닌 거지요. 지금 세상에 어느 집단이 신앙을 위해 인생을 통째로 걸겠어요?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에 대한 염원으로 건축, 기호학, 철학 등의 발전을 이뤄 냅니다. 비록, 미술 작품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못 생겨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 미술이 아닌 건축분야에서는 엄청난 발전으로 토목기술을 완성합니다. 중세인들이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이 인간이 아닌 신을 향했다는 차이점뿐입니다.


 

  중세의 천년은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서양 역사에 남긴 것이 고작 거대한 성당과 인쇄술뿐이라면 그 평가가 참 억울합니다. 혹자에게 암흑기일 수도 있었겠지만,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찬란한 문화 혁명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시간이기도 했지요. 혹시, 중세시대에도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바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둘 사이의 사랑이 중세문화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열정으로 불태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지요.

14C, <아벨라르 엘로이즈 삽화>

  39살의 아벨라르는 철학의 대가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개별자와 보편자를 논리적으로 통합했던 인물이었지요. 다만, 워낙 직설적이었기 때문에 숱한 적도 만들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참사 의원이었던 퓔베르의 조카 엘로이즈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비록 17살에 불과했지만 숙부 퓔베르의 애정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은 덕택에 당시 여성으로서 드물게 지성과 미모를 갖추고 있었지요. 퓔베르의 교육열을 알았던 아벨라르는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엘로이즈의 과외교사가 됩니다. 그리고, 아벨라르의 유혹과 설득으로 둘은 공부가 아닌 사랑에 불붙습니다! 훗날 그가 편지에서 말합니다.

 

  “교육을 한다는 구실 아래 동떨어진 별실을 제공받았고, 책이 펼쳐져 있었지만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의 이야기가 더 많다네. 학문의 설명보다 입맞춤이 더 빈번하였고, 나의 손은 책 보다 그녀의 가슴으로 항하였지. 퓔베르는 나에게 훈육을 위한 매질까지도 허락하였기에 의혹을 피하기 위해 때로 매질을 가하였다네. 그것은 사랑의 매질이었으며 애정의 매질이었네. 이 매질은 온갖 향료보다도 더 감미롭기만 했던 것이네.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우리는 열정으로 사랑이 생각할 수 있는 정묘함을 모조리 맛본 것일세"

 

  결국 엘로이즈는 임신을 하게 되고 숙부 퓔베르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둘의 결혼을 허락하게 되지요. 그런데, 엘로이즈가 오히려 결혼을 반대합니다! 자신의 연인 아벨라르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성직자가 될 수 있었기에, 결혼으로 인해 그 명성이 무너지길 원치 않았던 것이지요. 보통의 여인이라면 행복한 가정을 꿈꾸길 바랐겠지만 그녀는 연인의 성공을 위해 본인의 행복을 내려놓습니다. 신학이 모든 것이던 시대. 귀족이 아닌 이상 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점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요. 맹목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결혼을 반대하던 엘로이즈에 대해 숙부 퓔베르의 학대가 지속되자 아벨라르는 자신이 속한 수도원으로 엘로이즈를 피신시키게 됩니다. 둘의 사랑은 수도원에서도 이어지긴 했는데, 퓔베르 입장에서는 납치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겠지요. 결국 조카를 진짜 수녀로 만들어 버리자, 머리끝까지 화가 난 퓔베르는 사람들을 동원해 아벨라르를 거세시켜 버립니다.


  깊은 사랑을 했지만 중세의 흐름에서 거세당하고 수도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운명... 결국, 아벨라르는 남성성을 잃고 은둔하게 됩니다. 또한, 수많은 정적들로 도피를 하는 상황이었기에 본인 스스로 파라클레 수도원을 개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아벨라르는  편지 형태로 쓴 <나의 불행한 이야기>라는 책 쓰고, 당대에서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당연히 엘로이즈에게도 그 책이 닿았고 둘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게 되면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약 12통의 편지는 중세시대 최고의 서간 문학으로 탄생합니다. 엘로이즈는 그의 연인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나를 슬프게도 할 수 있고, 오로지 당신 만이 나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명령에 따라 수도사의 길을 걸었으며 나는 당신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 그것뿐이었습니다. 설사, 전 세계를 다스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나에게 결혼과 통치권을 준다 하여도, 나는 그의 황후로 불리기보다는 당신의 창부로 불리는 편이 더 기쁠 것입니다"


  둘이 주고받는 편지를 보면 엘로이즈는 연인 아벨라르에 대한 원망과 그럼에도 여전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오로지 신앙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어쩌면, 남성성을 잃은 아벨라르에게 과거는 아픔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편지의 흐름은 사랑에 대한 것에서 점차 종교와 수도사로서의 삶과 규율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그렇다고,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거예요. 비록 편지에서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힘들게 개척한 수도원을 엘로이즈에게 통째로 양도하고 여인들로 이뤄진 수도원의 성공을 위해 평생토록 하지 않았던 모금 설교도 하게 됩니다.


  둘의 편지는 아벨라르가 종교적으로 핍박을 받고 도피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끊어지게 됩니다. 아벨라르는 모함과 비난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던 와중에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본인이 개척한... 엘로이즈가 수녀원장으로 있는 파라클레 수도원에 잠들게 되지요. 그리고 22년 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같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함께 묻히게 됩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함께 한 시간은 고작 1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순수한 사랑은 길이 남아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러브 스토리가 되었지요. 어쩌면 , 중세는 찬란하게 다가올 다음 천년을 준비하는 시대였던 것 같아요. 맹목적이었지만 순수했고, 아픔이 있었지만 성숙할  있었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묘>

  "그녀의 유언에 따라 연인의 옆에 묻기 위해 묘지를 파헤쳤다. 그러자 죽은 아벨라르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엘로이즈를 맞아들였다."


  가만 보면, 수도승으로 삶을 살았던 아벨라르는 중세의 철학을 상징하는 반면, 여전히 사랑을 호소하고 행복을 바라는 엘로이즈는 르네상스의 열정 같아요. 아벨라르는 평생의 시간 동안 중세 철학을 완성한 후에 두 팔 벌려 그녀를 기다렸다면, 엘로이즈는 진실한 마음으로 아벨라르 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둘은 파리 인근에 함께 묻혀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천년의 사랑을 완성했지요.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사는 삶은 분명히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이끄는 삶만큼 순수한 것이 있을까요? 긴긴 시간 암흑의 시간 속에서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두 사람은 결국 운명에 수긍했습니다. 그들이 나눈 편지는 중세시대를 뛰어넘어 순수의 시대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들이 함께 있는 곳에 새겨진 글처럼 말입니다.


우리들은 바라노니,

차라리 연구, 재능, 애정, 불행한 결혼 그리고 개전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이제는 한결같은 축복 속에서 영원히 맺어지기를.

- 파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비명-

19C 에드먼드 블레어 레이트, <Abelard and his Pupil Heloise>

[참고]

정봉구_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임석재_서양건축사

강성률_한 권으로 읽는 서양철학사 산책

크리스토퍼 라셀레스_압축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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