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는 황금개띠 해. 아무것도 계획한 건 없지만 딱 한 가지 결심한 건 있다. 개의 해이니만큼 개 같이 살자는 것.
개인적으로 개만도 못하다, 개 같은 000,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좋아'같은 악센트 강한 접두사면 모를까. 듣는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속상한 일. 함께 지내오면서 느낀 건 강아지들은 나의 사람과 아닌 것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주인이나 친한 존재에게는 너무나 해사한 미소를 보여주며 갖은 표현을 다하지만 그 외의 존재들에게는 털을 곤두세우며 경계한다. 나는 모든 이들과 순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평생 안고 왔지만 두 손을 들기로 했다. 내가 잘 해보려 한다고 다 능사는 아니더라. 다른 이들에게 털을 곤두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엄청난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의 사람이나 내가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선 명백하게 노선을 흔들리지 않기로. 버릴 건 버리고, 버리고 싶지만 부득이한 상황으로 버리지 못하는 것이면 신경을 꺼버리는 걸로.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 위주로 간결하게 살아보기로. 복잡하고 걱정 많은 나에게 나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개단호'하게 살아보자고.
개들은 감정을 그리 숨기지 못한다. 얼굴로도 말하지만 귀와 꼬리가 말해주는 것도 많다. 얼마나 반가운지, 얼마나 무서운지, 뾰루퉁한지 모두 느낄 수 있다. 연기를 한다고 숨길 수 없는 것들. 우리 강아지가 우는 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쓸쓸해하거나 심심해할 때는 느껴질 때도 있다. 먼저 고개를 기대면서 들이밀 때, 놀아달라고 공을 가져올 때, 바짝 엎드려 공을 던져주길 기다릴 때, 바람을 가르며 산책을 할 때, 강아지는 신이 나 있다. 나는 그 솔직함에 늘 무너지고 말았다. 좀 피곤하고 힘든 날에도 강아지가 산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에, 그래도 같이 나갔다 오면 운동되고 좋지 뭐하면서 줄을 챙기게 됐다. 사실 강아지는 본인도 산책하면서 나를 함께 산책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뒤에 오는 저 언니 잘 오고 있나 가끔 힐끔힐끔 보면서. 나는 강아지에게 감정을 숨기곤 한다. 너무나 우울하거나 슬픈 날, 힘들고 지치는 날에 강아지가 고개를 뺴꼼히 열고 곁에 오면서 꼬리를 흔들면 숨기려던 걸 숨길 수가 없어진다. 기분이 사르르 풀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눈이 그렁그렁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늘 하는 말은 같다. 너만한 사람이 없다 그치. 너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근데 아마 네가 나한테 많이 맞춰줘서 그런걸거야. 나는 못됐지. 내가 있는 게 너한테 다행이고 기쁜 일이어야 할 텐데. 여튼 누리와 있을 때 나는 아마 가장 솔직한지도 모른다. 좋으면 마구 좋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평소에 나에게 볼 수 없는 모습이 누리를 대할 때 생긴다. 좀 더 솔직해지고 싶다. 사람 앞에서도, 모든 일 앞에서도.
개들은 대체로 어른들과도,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다. 나는 어른들과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아닐 때가 있다. 아닌 건 아니라고 꼭 입바른 소리를 해야 시원한 성격이 문제다. 물론 후회는 없지만. 가끔 골치가 아플 때는 있다. 왜 이런거까지 꼭 그래야만 싶을 때가 있어서, 알고도 모른척 하고 싶을 때가 있어서. 강아지는 졸졸졸졸 쫓아다니면서 꼬리를 흔들고 같이 기다리고 사소하게 챙겨주는데서 얼어붙은 어른들의 마음이 열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기 나름으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강아지처럼 어른들과 부딪치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존중할 건 존중하고, 가끔 서운하게 굴어도 먼저 다가서는 마음 넓은 개. 마음이 넓어지고 싶다. 한도 끝도 없이 넓어져서 벽을 녹여버리고 싶다.
진득하게 믿고 기다린다. 강아지는 믿기로 한 존재는 믿는다. 가끔 잘못을 해서 혼을 내도 금방 미안해져서 이리 오라고 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온다. 나같으면 존심 상해서 안왔을 텐데. 작은 강아지들을 더 표현이 많아 계속 뭔가를 하자고 조를 수도 있지만 중대형견쯤 되면 진득하게 가만히 앉아있기도 한다. 집 안에 가끔 덩그라니 있으면 어지간하면 보채지 않고, 물건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냥 시간을 보낸다. 반가운 사람이 오는 시간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계단 사이에서 강아지가 보인다. 나를 기다렸구나. 알아듣는지 못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괜시리 멀리 가면 나 오늘은 집에 안들어와, 며칠 있다 올거야.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있어. 말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아지는 밥을 덜 먹으면서 기다린다. 돌아오면 무척 기뻐한다. 이 말 정도는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음 좋으련만. 보채지 않고, 성질 내지 않고 기다리는 걸 잘 못한다. 티가 나지 않아도 속은 막 뒤집어질 때가 많다. 믿는 게 어려운 세상이라고, 기다리기엔 조바심이 나는 세상이라고 해도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도 믿으면서 기다리고 싶다. 뭘 믿으면서 기다리고 싶은진 모르지만 출발점은 분명 나일 것이다. 내가 나를 믿고 기다릴 줄 알게 되면 어지간한 흔들림에도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개 같이 살고 싶다. 좋은 집에서 자라면 아침 저녁 주인에게 비위를 맞추며 호위호식하는 본격 한량 서비스직이어서가 아니라, 솔직하고, 포용력 있고, 기다림과 믿음에 익숙하고, 나와 내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명확하게 세워져있어서. 올 한 해는 개 같은 한 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