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 P.150
이상했다. 오랜만에 꺼내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만큼이나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볼 때마다 별 일 아닌 것 같은 별스러운 느낌에 놀라곤 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다. 줄곧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없었다. 애초에 무엇에 반했던 것일까?
책이 별로라고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때보다 덧없다는 느낌이 너무 컸다. 책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도 말이다. 늘 뒷통수를 맞은 듯이 느껴진 건 결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 별 것 아닌 늦을 것 같다는 전화가 마음을 철렁하게 하는 결말이라는 걸 책을 덮을 때 알게 된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다시 믿어보는 멍청한 짓을 한다. 그런데 이번엔 뒷통수를 맞은 것 같지 않았다. 폴이 어리석다 생각하지 않았고, 시몽이 어리다 생각하지 않았다. 로제는 서로에게 얽매이기는 싫으면서 아주 혼자이고 싶지는 않은 욕심쟁이겠지만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건 또 다른 일이지만. 그는 이기적일 수도 있고 솔직한 걸 수도 있다. 혼자여서 혹은 둘이어서 손해보고 싶지는 않은 사람.
이 어리고 혈기 왕성한 청년이 자신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기쁨과 회의와 온정과 고통으로 뒤범벅된 그 오 년을. 그 누구도 자신을 로제에게서 떼어 낼 수는 없으리라. 그녀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데 대해 로제에게 감사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탁자에 몸을 기댔다.
"당신은 로제를 사랑하지만 지금 혼자 있습니다. 당신은 일요일마다 혼자 있겠지요. 당신은 혼자 저녁 식사를 하고, 아마도...... 아마도 종종 혼자 잠들겠지요. 하지만 저라면 당신 곁에서 잠들 겁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품에 안고,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 당신에게 입 맞출 겁니다. 저라면 그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렇지 않죠.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에겐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없어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제겐 당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서 당신을 빼앗아 올 권리가 있습니다."
- P. 64
통속적이라고 보면 아주 통속적이다. 인용된 부분만 보아도 대충 감이 올만한 이야기다. 오래된 남녀사이에 찾아온 낯선 사람. 띠동갑도 넘게 차이가 나는 새로운 관계. 39살의 여자 폴과 25살의 남자 시몽. 브람스와 그의 연인의 나이차이를 떠올리게 하면서, 시몽이 폴에게 건네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나이를 알 수 없지만 폴과 비슷할 로제. 폴과 로제가 바로 시몽이 나타나기 전까지 별다를 것 없는 오래된 커플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로도, 한 가족이나 집으로 묶이지도 않고 자유롭다. 폴에겐 고독이 되고 로제에겐 자유가 되는 사이. 그녀에게는 기댈 수 있는 안정감이 필요했고 그는 집착이나 구속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매일 같은 대사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혼자 있어?"하고 로제가 그녀의 문을 두드리면 "응, 들어와" 말을 맞춘다. 그들의 시간이 반복된다. 그는 폴의 물건을 잃어버리고 깨뜨리고, 식당에 가서 춤 같지 않은 움직임으로 춤을 추고, 식사를 하고 때로는 함께 잠을 자거나 헤어진다. 이들이 사랑한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것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겉보기로 구분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아주 오랜 시간 그들은 함께했고 오래된 관계에서 시간은 사소한 곳에서 연륜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그와 그녀가 숨기고 싶었던 것들. 아주 사소한 거짓말. 그가 그녀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걸 그 사소한 도로 교통 사정에 대한 흘러가는 말 한마디로 알 수 있다니. 때마침 그런 폴에게 다가온 진솔한 시몽 덕분에 그들은 '한동안 만나지 않는 방식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 헤어짐조차 꼬리가 길다.
시몽은 폴과 로제에 비하면 아주 젊지만 그의 마음은 젊지 않다. 그는 의욕 없는 변호사이고 그건 아마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수많은 법 조항이 그에게 가르쳐 준 법적 지식이 그의 사랑에도 '권리'와 '죄'로 재미나게 쓰인다. 흐리멍텅한 그의 눈에 빛난 건 폴이었다. 그는 폴을 좋아하는 걸까, 폴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늘 상처받는 사람, 스스로를 고독에 빠뜨리는 사람을 본인이 구원해줘야겠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에게 헌신하는 한결같은 태도에 반한 것일 수도 있다.
시몽의 사랑은 너무나 열정적이고 소모적이어서 거의 모든 시간을 상대방에게 쏟아 부어버린다. 물론 그녀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지만 우려를 증폭시키는 역효과가 있다. 시몽이 자신이 없는 동안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지게 만드는 것이다. 시몽은 술을 달고 살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한번 마음에 든 사람에겐 타협하지 않는다. 밀어붙이고 표현한다. 마음을 먹으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마음을 잘 먹지 않는다. 폴과 로제 사이의 균열을, 폴이 걱정하고 있는 것들을 그녀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잘 꿰뚫고 있을 정도로 날카롭다. 물론 그는 어리다. 그가 진지하고 강하게 폴을 설득시키고 나서 스스로 뿌듯해 하는 모습을 보면 멋있다는 느낌보단 귀여운 느낌이 강하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폴을 직접 대하는 것은 부끄럽고 어색해 하곤 한다. 그게 그가 폴과 로제에 비해 느끼지 못한 시간이란 녀석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물 다섯 살의 시몽에게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그는 조금은 슬프고 몰라도 될 것들을 알아차리는 25살인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중략)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여기 내 몸이 있어요. 내 열정과 애정이 있어요. 이것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지만 당신에게 준다면, 나로 하여금 다시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줄지도 모르죠."
"알다시피 나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스물 다섯 살이야.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살진 알았지만, 앞으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
"당신이 다시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P.44, 102, 153, 73
시몽의 말말말. 예전엔 시몽이 용기있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그의 추진력에, 그가 폴의 고질적인 문제를, 고독이란 죄를 명하는 그런 극적인 말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변호사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으나 여튼 그의 매력은 입담에서 빛을 발하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왠지 모르게 기운없는 그가 더 궁금했다. 스물다섯살의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신기해야 할까 아니면 스물다섯이라서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가 고독의 괴로움을 알게 된 계기가, 연배 높으신 분께는 '예끼'소리를 들을 그의 '사는 맛'에 대한 생각까지. 왜 그에게 젊음이, 열정이, 애정이 아무 소용이 없는지. 그의 용기가 사실은 깊은 고독에서 비록되었다면 멋있다기 보단 마음이 아픈 일이 되어버리니까.
'내가 가진 건 무엇인가? 도대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하고 그는 자문했다. (중략) 편안한 생활, 유쾌한 친구들과 여자들, 햇빛 비치는 탄탄대로...... 이 모든 것이 머릿 속에서 빙빙 돌고 있었지만, 어느 것에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그것이 그의 스물다섯 해였다.
-P.30
스물다섯. 책에서 시몽을 설명하는 스물 다섯이라는 단어는 폴의 서른 아홉보다 훨씬 더 자주, 많이 등장한다. 많은 스물다섯 살이 스스로를 '반오십'으로 부르곤 한다. 반오십이라고? 갑자기 놀라는 모양이다. 오십이 머지 않았어! 우리는 오십으로 가는 컵이 반이나 찼다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무살을 반사십이라거나 서른다섯을 반칠십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스물다섯은 그런 독특한 나이인 것이다. 이런 속도로 가다간 아주 빠르고 손쓸새도 없이 늙어버릴까 두려워서일 것이다. 막상 그렇다고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면서 미친듯이 절박하게 한 톨 한 톨 눈에 불을 켜며 사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손가락을 흘러가는 시간은 바라보면서도 쌓여있는 그 시간에 한탄하는 것이다.
'반오십'이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여태까지의 25년과 앞으로의 25년은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전자가 빨리 나이가 들기를, 그래서 어른이 되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냈다면 후자는 진짜 어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거나 좀 더 젊은 마음으로 살기를, 천천히 나이가 들기를 바라는 심보다. 청개구리같이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꿈꾸며 마음도 꼭 반대이기 때문이다. 시몽에게든 누구에게든, 스물다섯이든 반오십이든, 외로움을 느끼기에는 적절한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청춘은 드라마처럼 다이나믹하지 않고 따뜻한 봄도 아니었다. 되려 바람이 스산하고 마음이 차가움으로 울렁거렸다.
알 수 있었다. 왜 예전에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 사라졌는지. 시몽을 알 수 없고 폴과 로제의 속마음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고 알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느낌이다. 알고 싶은 것이 마음을 다한 열정적인 사랑이라면, 알고 싶지 않은 것은 덧없음이었다.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를 만나고 있는 이상한 남녀. 좋으면서도 괴로운 이상한 감정. 화가 났다가 서로가 다시 그리워지는 마음.
하지만 시몽의 마음은? 그저 폴과 로제의 시선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한 이는 후회가 없다고 하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예외다.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자인 로제는 시몽 덕분에 밀회를 공식적으로 즐길 수 있었고 폴은 권태로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시몽에겐 상처뿐이다. 그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가 그녀를 보며 했던 복잡한 마음 속 생각들, 그가 손을 가끔 떨어가면서도 늘상 술을 마셔댔는지 그 이유 같은 것들 말이다. 하다못해 폴과 헤어지는데도 억장이 무너지는 그의 심경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폴이 그를 잘 알고 존중했다면 '장난꾸러기 시몽'같은 단어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녀에 대한 마음을 진지하게 밀어붙이려던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는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야."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 언젠가 당신이 나를 쫓아내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야."
-P. 124
폴은 시몽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시몽은 늘 '그'였지 로제처럼 '우리'의 범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시몽과 함께 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로제가 돌아와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시몽을 불쌍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상황을 괴로워하면서도 즐기고 있었다. 시몽과 헤어지며 폴은 '나는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 그녀는 고독하고 늙었다. 어차피 그 사람이 그 사람, 그 사랑이 그 사랑이라는 체념일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변명이자 진심이었다. 사람과 사랑에 지친 그녀는 시몽을 보고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시몽에게서 25살의 그녀를 조금은 보았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25살일 때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물가에서 누워있던 시절이었다. 모든게 잘 될 것이고 무척이나 누군가를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 잊혀지는 자신을 찾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남편과 헤어지던 용기가 있었다. 그녀와 달리 찬란하고 행복감이 만연한 스물 다섯 살이 아니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는 스물 다섯이었는데도. 그녀에겐 그는 끝까지 '스물 다섯'으로 기억된다. 그녀가 다시 돌아갈 수 없고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이 살아있는 나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더 이상 그녀가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진 재가 되어버리고 나서 남은 장작이 한창 타오르는 불빛을 보면서 아득해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문득 그녀는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번개 같은 깨달음과 함꼐 자신의 삶 전체와 세상을 받아들였다. (중략) 그 이후에도 그녀는 다른 이들과 함께 혹은 다른 이들로 인해 행복감을 맛보았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복했던 것은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를테면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기억과 비슷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중략)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 뿐인지도 몰랐다.
-P.10, 57
그녀는 부루퉁하고 비뚤어진 로제를 보면서 여전히 그가 이래서 좋았지, 하고 과거의 기억을 되뇌일 뿐이다. 시몽을 선택하지 않은 그녀에게 뭐라 하고 싶지 않다. 로제만큼이나 시몽을 선택하는 일은 극단적으로 급진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그녀는 6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들여 로제에게 자신을 맞췄다. 새로운 만남은 그녀에게 구설수를 불러왔다. 로제가 바람을 피던 때도, 전남편 마르크와 헤어질 때도 이러쿵 저러쿵 있었으나 시몽과의 관계에서는 난데없는 구설수가 또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이 차이가 많다고 수근거리는 소리에 울적해졌고 역시나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눈 앞에서 시몽을 본 게 아니라 '어느 젊은 남자'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의 한 여름밤의 꿈이라고 생각하는 속내가 드러난다. 그러나 나이가 중요한 원인이었을까? 시몽이 25살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그녀는 자기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잃어버렸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고 고독을 잠재울 만큼 늘 함께 있어도 이상하게 그 모든 게 그녀의 무엇도 동하게 만들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이 뛰지 않고 '사랑해'란 말을 들은 얼굴만 거울에 있다. 그녀의 얼굴엔 사랑이 스며들지 않고 표면에서 굴러다니다 뚝뚝 떨어졌다.
폴은 시몽에게 미안할 만큼 로제에게 그와 떨어져 있어서 불행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로제와의 관계에서 잠시 우회했을 뿐이다. 늘 그렇듯 로제도 폴도 변하지 않는다. 정말 불행한 건 무엇일까. 변하지 않을 이 두사람이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일까. 이 둘 누구도 사랑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일까. 이들의 마음이 늙어버렸다는 점일까. 언제 헤어졌었냐는 듯, 로제는 다시 그녀를 고독에 빠뜨린다. 그녀를 혼자 두게 만드는 그 전화 한 통으로. 아마 다시 또 '멍청한 여자'를 만나면서 또 그녀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에게 늘 '괜찮아'라고 말하는 그녀를 비추는 거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이제는 가끔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남자가 한 명 더 추가될 것이다. 그녀는 여태까지 그랬듯 이만큼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좋은 동반자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냐며 안도하며 합리화하고 있을 것이다.
책 표지에 쓰인 샤갈의 <생일>. 그림에 넘치는 사랑은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제목은 그렇지만은 않다. 시몽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음표를 쓰지만 책의 제목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줄임표가 붙는다. 아마도 사강이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를 쓴 것은 줄임표에 질문을 하는 본인과 상대방의 마음이 담긴 게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의 뜻은 큰 의미가 없다. 시몽이 폴에게 건넬 땐 당신과 무엇을 하든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풋풋한 마음이 들어있는 문구. 거절당할까 두려워 조심스레 건네는 말. '영화보러 가실래요?'와 다를 바 없는 그 말. 그 말을 들은 폴에겐 풋풋함에 인상깊으면서도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다시 할 때 깊은 고민에 빠질 뿐인 말. 당신이 그렇듯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 아닌지 두려워지는 말. 그녀가 선택한 로제에게서는 아마도 영영 들을 수 없을 그 말. 그렇게 서로 다른 의미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서로 다른 의미의 말줄임표가 내게는 무서웠다. 그 말을 들어도, 하게 될 때도 생각이 많아질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