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와 주관적인 리뷰가 담겨 있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 결혼은 할 예정이니, 만나는 사람은 있니, 직장은 어때, 이런 얘기를 할 때 '어른들'은 어떤 생각일까. 경험상 반은 그냥 하는 소리고, 반은 나름 진심이다. 내 자랑을 하기에 앞서 판을 깔아두는 것이기도 하고, 자주 만나지 않는 친척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신변잡기적인 것이다. 그러면 뭘 물어보면 좋을까. 어느새 명절을 앞두고 '어른들'은 주의를 받는다. 농담삼아 그런 얘기를 하려면 지갑 꺼내놓고 시작해라,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제약을 두니 마땅히 정말 물어볼게 없더라. 정말 뭘 물어보라는 거냐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를 물어보아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질문이라는 건 반응이 필요하지만 마침표나 느낌표로 이어지는 말은 어떤가 싶고. 침묵과 고요함이 더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또 굳이 소리를 낼 필요는 있을까. 침묵과 고요는 홀로 있을 때만 있어야 하는가. 함께 있을 때 함께 누릴 수는 없는 것인가. 그런 마음을 앞두고 읽었으면 좋겠는 책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다.
예전에 읽었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비해 색이 진한 느낌이다. 자기 주장만 늘어 놓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단단함이 느껴진다. 혜민스님이 스스로에게 할 법한 말을 모아둔 느낌도 난다. 그를 둘러싸고 여러 말이 오갈 것이다. 스님을 속세를 떠나 도를 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SNS며, 신문이며, 책으로 얼굴을 자주 비추는 스님을 유난이라고 할 것이고,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영향력있고 마음치유학교도 자리잡은 걸 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짚어주고 위로를 건네주는 스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번 책에서 신기했던 건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많이 그러곤 하지만 스님이라는 존재에게선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얕은 지식이지만 이름을 달리 쓰고, 머리를 깎고, 인연을 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이 역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으나 스님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 계기가 되긴 했다. 스님이 되기 전 친구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가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긴 했다. 한편으론 자꾸 속세에 얼굴을 비추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그는 애초에 스님이 될 생각이 없이 유학길에 올랐다가 스님이 되었다. 어머니가 그의 자취를 글이나 기사로나마 만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기에 책을 처음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 책이 일종의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뜻이다. 글쎄, 속세를 떠나야겠다는 확신이나 담력이 없는 나로써는 누군가를 위해 쓴 책이라는 개념이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인연이라는 것 역시, 과거의 나의 모든 것 역시, 한편으로는 다 사라지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혜민스님에게는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따뜻함을 전해준 소중한 사람이 많았다. 물을 떠다놓고 칠성님께 기도를 드리던 할머니. 그 모습을 '미신'이라고만 치부하지 않고 미신이란 주류가 아닐 때 붙이는 말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책을 내고 나서 연락이 온 아주 오래 전 친구. 어릴 적 추억을 나누다가도 진지하게, 좋은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달라며 존댓말을 한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혜민스님에게 이 책은 유독 그 고민이 드러난 책일지도 모른다. 세상과 등져도 한 소리 듣고 세상과 너무 가까워도 한 소리를 듣는 '승려'라는 자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승려라는 자리에서 계속 나아가는 혜민이란 한 사람에 대해서.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책을 가득 채운 내용 말이다. 누굴 미워하지 말자, 나를 위해서라도. 실패만 겪더라도 나중에는 다 도움이 될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자. 말만 하지 말고 행동하자. 알고 있었던 말이었으나 제대로 행하기는 힘든 말이라며 엄마와 나는 궁시렁거렸다. 그 사람은 스님이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라는 게 숨겨진 말이었다. 그렇다면 스님만, 혹은 비슷하게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만 나를 찾고 평온과 고요를, 끝이 없어 보이는 고민의 길을 걷는 것인가. 좀 더 사람이 많고, 좀 더 정신없는 곳에서 우리는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똑같진 않지만 다르지도 않기에 어쩔 수 없는 변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길을 걷고 삶을 살고 뭔가를 찾으려는 건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침묵에 관한 동화였다. 바닷속 물고기 모두가 죽음의 동굴을 통과해 '바다'를 만나려 하지만 쉽사리 성공하지 못한다. 동글이라는 한 물고기 역시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죽음 동굴 앞에서 바다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고 아주 캄캄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순간을 지나 마침내 출구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갑자기 그를 스쳐지나간 생각은 그렇게 찾던 바다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그 평온한 침묵이었단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서 바라본 세상은 여전히 파랗고, 온갖 소리가 가득하지만 침묵 역시 보인다는 이야기. 애당초 물고기가 바다 속에 있으면서 '바다'를 찾아 헤맨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거 무슨 바보 아닌가 싶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늘 나와 함께 하면서도 내가 무엇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침묵은 두려운 존재였다. 늦은 밤 내가 침묵하면 시계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 나올 것만 같았다. 상대 앞에서 대화할 때도 말이 오가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말주변이 너무 없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너무 잘 맞지 않는 건 아닌가 같은 생각에 속으론 패닉상태에 빠져있을 때가 많았다. 요즘엔 예전보다는 침묵이 좋아졌다. 이렇게 방에서 타자만 치고 있을 때 평온하다. 강아지와 별 말 없이 있어도 좋다. 나의 걱정이 다 맞을 수도 있다. 상대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상대를 싫어할 수도 있고, 우리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애써 마음에 들 필요가 있는가. 마음을 거절당하면 당장은 서운하고 속은 상하겠으나, 결국은 그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다는 책 구절이 와닿았다. 예전보다는 노력을 덜 하고 있다. 누구의 마음에 들려는 노력, 말을 채워넣으려는 노력. 그런 노력은 한다. 자꾸 마음이 앞서 챙겨주고 잔소리하고 싶을 때 기다리는 노력.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언니도, 누나도, 엄마도 되고 싶지 않았으면서 늘 마음이 쓰인다는 이유로 이기적인 일을 했다.
말을 끊지는 않지만 반응이 너무 빨라서 놀림을 받을 때도 있다. 나야 편하지만 상대방은 다를 수 있겠다. 친구가 면접을 앞두고 질문을 했다. 너무 빨리 대답하면 안 좋게 본다는 데 그러냐면서. 그래서 에이,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나 아니면 끝나자마자 엇박처럼 바로 얘기하지 않는 이상 이상할게 뭐 있어. 라고 했는데 어쩌면 내가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핑퐁처럼 오가는 말을, 빠르게 받아치는 말을 좋아하지만 그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강아지가 함께 걷고 있는 나를 잘 오는지 뒤돌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을 해야겠지. 말을 잘 한다는 게, 글을 잘 쓴다는 걸 늘 조금은 삐딱하게 생각해왔던 모양이다. 쉬지 않고 말과 글을 꽉 채우는 게, 현란한 표현을 쓰고, 말문을 막히게 하는 정곡을 찌르는 말 역시 늘 답이 되지는 않는다. 친구들이 쓸 말이 없다며 짧을 글에 문장을 채워넣느라 고민할 때 나는 할 말이 많아서 글을 길게 쓸 수 있어서 우쭐할 때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안다. 글과 말은 길이와 속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여전히 말은 많다.(보시다시피) 그래도 좀 더 들으려고 할 때가 많아졌다. 이렇게 긴 글을 보고 무슨 말이 줄었냐고 하겠지만, 한번쯤은 이렇게 할 말 많은 사람이 가만히 응, 응, 하고 있는 상황이 조금 더 자주 생겼다. 알고보니 상대방이 제법 말을 많이 한다.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평온을 되찾으면 나는 내가 두려워하던 눈을 좀 더 쉽게 마주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물론 내가 정말 누군가가 편해지는 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정말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침묵이 두려워 쏟아내던 말의 본질도, 그 말로 나를 너무 노출할까봐 두려워 상대를 잘 바라보지 못했던 것도. 그러니까 나는 도망칠 필요가 없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두를 잠재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 사람이라는 가정을 한 채 보고 있었다. 침묵도, 사랑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도,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거란 걸, 내가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을 걸 알면 된 거다. 고요함과 침묵에 익숙해지는건 어두운 밤에 불빛 하나 없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무섭고 어렵다. 때로는 발을 찧을 것이고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부딪힐 수도 있다. 홀로있음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점점 더 익숙해져 감당하게 되었을 때 그 어둠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밝게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