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작년과 사뭇 다른 느낌이 강렬하다. 버티지 않고 살아가려고 했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2018년에 일어난 일: 악당 전문 잡지 <악당출현> vol. 1 출간 참여, 브런치 무비패스 경험, 바리톤 색소폰 구입,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앙상블 2년차. 첼로에 잠깐 발 담금, 요가를 시작한지 1년. 주5일 요가로 전환! 두번의 자리 이동으로 정신없는 나날. 조카는 한 음절의 단어 위주로 제 편한대로 말을 시작함. 대만으로의 출장에서 뜻하지 않은 동시통역(ㅠㅠ). 베트남으로의 10년지기 친구들과의 첫 해외여행. 고등래퍼 병재와 하온, 이로한. <미스터션사인>의 사극톤. 최인훈 <광장>을 읽고 신랄함에 놀라고 좋았음.
간간히 찾아오는 외로움과 아픔을, 기쁨을 받아들이는 법을 조금은 안 것 같다. 작년에는 나에게 무척 힘 빠지고 상처가 되는 말을 해준 사람이 많았는데 자리를 이동하면서 정말 신기하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인지 여태까지의 나도 장하다고,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그 간 고생이 많지 않았냐는 말에 꿈인가 생신가 싶기도 했다. 빵점짜리라는 말을 듣다가 좋은 인재라는 소리를 들으니 사람 앞일은 참 모르겠고, 사람 마음 역시 참 간사한 것이구나,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깨달은 후였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릴 필요 없다고. 나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평가만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예 듣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열심히 듣겠지만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그들의 말로 내가 휘청이는 일은 없도록. 흔들려도 괜찮다. 다만 영영 내가 조종당하게 두어선 안 된다.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기쁜지, 뭘 두려워하는지. 왜 싱숭생숭하거나 서운한지. 감정의 껍질을 벗기다 보면 뭔가가 거기 있다. 내가 정말 망하길, 못나길 바라는 사람보단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가장 큰 장애물도, 나를 가장 빛나게 해준 장본인도 내가 아니었던가 했다. 마음을 먹지 못해서 뒷걸음질 시작하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곤 하니까. 이겨내려고 하기 보다는 어르고 달래가면서 시작해봐야지 한다. 날이 추워지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갈까 말까 생각이 스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고민에 비해선 벌떡 잘 일어나고 있다. 신나서 운동복도 쟁여놨고 막상 가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흥미롭기도 하다. 선생님처럼 예쁘고 좋은 말을 많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삐딱하고 날선 말이 좀 습관이 되어서 쉽진 않다. 끝나고 나서 목을 허브 오일로 만져주실 때가 있는데 어쩜 그렇게 매번 설레고 감사한지!(말해놓고 보면 이상함) 적당히 화한 느낌이 나기 떄문에 피곤했던 머리가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때문인 것 같다. 예전보다 발이 땅에 더 부드럽게 닿을 때 기분이 좋다. 우리 뻣뻣이가 달라지고 있어요 같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서른 아홉의 폴이 '나는 늙어버린 것 같다'고 되뇌이지만, 나는 올해의 내 마음이 좀 늙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몇 년 새 폭삭 빠르게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고민을 했다. 직장에서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나는 내려놓고 윗사람에게 최적화된 사람으로 살아가며 승승장구하는 것이 좋은가. 혹은 윗사람의 눈초리가 따갑더라도 나의 소신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갈 것인가. 성공은 무엇인가. 나를 지키는 것인가 더 많은 힘과 영향력을 얻어 주도하는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게 이미 나는 그 위기를 작년에 겪었고 몸이 거부해서 어차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자리에도, 사람에도 충성하지 못하겠다. 없는 말과 표정을 지으면서는 더더욱 못하겠고 방관자로 남아있기도 그렇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단히 능력이 넘치고 청렴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게 내게 자연스러울 뿐이다. 살아갈 길은 그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주변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라는 건 꽤 이상적인 것이구나. 누군가는 정말 받을만큼 빛나지만 아주 많은 경우,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고 일보다는 말로, 남을 밀어내면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높이 올라간다는 게 이상하다. 물론 내가 훗날 그런 사람이 되어있진 않을까 장담할 수 없다. 초심을 지키는 게 아니라 변하는 나를 경계해야 한다.
작년보다 나아졌지만 열정과 의지가 넘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을 무기력하게 보내게 될까? 예전에 장전된 에너지가 반 이상은 사라진 기분이어서 두려웠다. 대단한 걸 이룬 것도 없지만 더 이상 뭔가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고, 이렇게 하향세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했다. 여태까지 늘 무리해왔던 걸까 아니면 이제 편안함의 늪에 빠져버린 것일까? 고작 이러려고 수많은 날을 고민했던걸까 싶을 만큼. 아니다. 늙은 게 아니라 지친 것이다. 늙었다는 말이 지쳤다는 뜻이라면 맞겠지만 늙음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두고 하는 얘기라면 지쳤을 땐 언제가 될진 몰라도 푹 쉬고 나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깊은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자.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는 사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지쳐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복이 더디고 뭔가를 하고 싶어지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이 뭐가 힘들겠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힘들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그 원천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도망치는 건 늘 쉬우니까. 쉬워서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오늘은 도망치지 않기로 하는 마음을 가져보려 한다. 도망가다가도 다시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기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채워야 할 빈 종이가 많다. 여백이라고 꼭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을 지나치게 줄일 필요는 없다. 생각이 많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생각이 없다고 질책하지 않겠다. 언제 준비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그저 매 순간 행한다는 마음이겠다. 평범함과 특별함의 어느 범주에도 다른이와 나를 비집어 넣지 않도록.